전남지역 민간인 희생자 절반이 영광지역에서 발생
전남지역 민간인 희생자 절반이 영광지역에서 발생
  • 영광21
  • 승인 2012.09.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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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지역 피해규모 과다원인 수복 늦고 보복많아 … 영광여성피살자 전국 여성의 절반 차지

■ 8·15 광복 이후의 영광 ⑦ - 6·25와 영광지역 민간인 피해
1950년 8월22일 북한 내무성은 자위대로 명칭을 통일하는 한편 자위대원들의 무기소지와 사용을 금지하고 자위대를 내무소·분주소의 통제하에 두는 조치를 취했다. 즉 내무서 → 분주소 산하에 각 마을 자위대가 편입되는 치안체계를 수립했다.

그런데 9월 중순 이후 내무성 → 내무부 → 내무서 → 분주소로 이어지는 북한의 공식체계와는 별도로 당이 주관하는 특별자위대가 조직돼 이미 7월9일 노동당정치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도·시·군당위원회 산하에 특별자위대를 조직해 지역방어와 치안유지를 담당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9월7일 인민군 전남내무부는 시군별 특별자위대의 조직을 지시했다.

전남 특별자위대는 도 총사령부 산하에 군 → 면 → 리 → 마을단위별 노동당책임자가 사령관 또는 대장을 맡고 내무서 혹은 분주소의 책임자가 부대장에 취임하는 방식으로 조직됐다. 이에 따라 영광군에서도 9월 중순 군 → 면 → 리 → 마을단위에 특별자위대가 조직됐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9월말부터 극좌 지역유격대 체제로 개편돼 면 유격대, 생산유격대(일명 바닥놈) 등의 명칭으로 불렸고 이들이 중심이 돼 군경 및 우익인사와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9월말부터 지역유격대 체제
대한청년단원, 경찰과 그 가족, 우익인사 및 그의 가족들에 대한 가해만이 아니라 그들의 만행에 동조하지 않거나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의식적 반동’으로 몰아 친척간에도 살상이 강요됐으며 노인, 부녀자,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당시 마을구성은 혈족구성이 기본
영광지역의 촌락을 살펴보면 사회적 요소와 종교적 관념 및 기타의 목적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마을을 형성하는 원리는 혈족이 가장 기본적이었다. 한 마을이 반드시 친족집단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친족관계는 마을구조를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했다.
문중이나 씨족 등과 같은 혈연적 유대에 근거해서 전통적인 마을이 형성됐다. 이러한 마을공동체는 함께 뭉쳐서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900년~1950년대 영광읍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은 친족집단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사회조직 또한 이러한 구성 원리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이러한 점이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집단희생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지역의 사회조직을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기제로서 기능했던 영광의 성씨 현황을 살펴보면 정확한 통계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피해를 당한 성씨는 89개가 넘는다.

이와 관련해 좌익에 의한 영광군 민간인 희생자가 기록된 <6·25사변피살자명부>(공보처통계국, 1952년 3월31일)를 살펴본다. 전남지역과 영광군의 희생자를 비교분석한 것이 다음의 <표1>이다.

피살자명부 우익에 의한 희생은 누락
<표1>을 살펴보면 목포가 제외돼 있는 가운데 영광 → 영암 → 장성 → 보성 → 함평 순으로 민간인 희생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에 포함된 영광군의 민간인 희생자는 좌익에 의한 희생자들이다. 이 자료의 범례를 보면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했다”면서 대상을 “군경을 제외한 비전투자에 한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브르스커밍스, 존 할리데이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한 직원의 증언을 빌려 “남한에서는 아마도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이 숫자는 전쟁기간에 걸쳐, 남북한 전체에서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최고치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라고 기록했다.

6·25전쟁기간 중 영광에서의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적게는 2만5,000명에서 많게는 3만5,000명까지로 추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6·25사변피살자명부>에는 총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전남지역 피살자만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전체 피해자 중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인데, 여자 중 1만3,946명이 전남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지역에서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지역 피살자 4만3,511명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에 가까운 7,914명이었다.

영광지역 민간인 피해자 분석
20세 미만의 희생자가 8,107명으로 전체 피살자의 38%를 차지하고 있으며 10세 미만의 어린이도 3,531명으로 전체의 약 16%이다. 20세에서 50세까지의 희생자 수는 전체의 약 51%인 1만829명으로 나타난다.
<표2>에 의하면 농업이 78%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한청관련 희생자 수가 5명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한청원의 희생자는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표3>을 보면 영광읍의 희생자는 전체 희생자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백수읍, 염산면의 순으로 나타난다.

영광군내 대부분의 씨족이 피해를 당했다. 89개의 성姓과 확인되지 않은 성씨는 523명이다.
영광과 인접한 나주(3,596명)·장성(4,306명)·함평(1,954명)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수치는 공보처 통계국과 언론사, 관련논문들 등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6·25사변피살자명부>는 공보처 통계국에서 1952년 3월31일 작성한 것으로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년월일, 피해장소, 본적, 주소 등의 8개 항목으로 피살자의 신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8년 한국전쟁 전후 영광군피해자현황조사 결과 좌익에 의한 새로운 피해자에 나타나기도 했고 직업 등에서는 오기도 나타난다. 그리고 <6·25사변피살자명부>는 좌익에 의한 피해규모만을 밝히고 있다.

영광지역은 대치상황 속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완전 수복이 늦어 보복에 의한 희생이 더 있었고 정신적 충격이나 정보부재, 고의적 은폐 등으로 신고하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영광의 참상에 대해 <동아일보> 1950년 12월 22일자 전남지구 민정순찰기(상)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전략- 이들 양민의 피해는 영광이 2만1,040명, 영암이 1만2,044명으로 사망률이 가장 심하며 그 반면에 여수가 80명, 순천이 63명으로 여순사건의 쓰라린 경험을 맛본 영향을 받음인지 가장 평온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영광, 영암, 장성, 무안, 장흥 등지를 가보면 어버이를 잃은 고아들이 수천 명에 달하고 있으며 또 자식을 모조리 피살당한 부모들이 넋을 잃고 매일같이 앙천통곡하고 있는 모양은 차마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인민군 후퇴 전후시기 각 면별 피해 분석
영광지역 민간인 피해의 특징 중 하나는 영광군 전역에 걸쳐 지역좌익에 의해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영유아를 포함한 아동, 부녀자, 노인 등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방법으로는 능지처참, 척살, 참살, 수장, 생매장, 총살, 구타살해 등 다양했다.

(1) 영광읍
영광읍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무령, 백학, 남천, 도동, 교촌, 연성, 월평, 단주, 덕호, 신월, 양평, 와룡, 계송, 입석, 우평 등의 15개리로 개편됐다가 1983년 2월15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군서면의 녹사리, 학정리, 신하리, 송림리가 편입되면서 19개리로 이뤄지게 됐다. 1949년 영광읍의 인구는 1만7,470명, 2009년에는 8,246세대 2만1,094명이 거주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영광읍은 6·25전쟁으로 영광군 전체 희생자의 약 25%인 5,185명이 희생됐다.

영광읍 군 전체 희생자의 25% 차지
영광읍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앞에서 기록했듯이 1950년 7월23일 새벽 3시경이었다. 영광에서는 전남에서 광주에 이어 군단위에서는 처음으로 3·1운동을 전개했고 1920년을 기점으로 교육운동, 청년운동, 노동·농민운동, 문예체육운동, 신여성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광복후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인민위는 중앙의 권력이동에 따라 흡수·해체됐으나 좌경화된 일부 극좌청년들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여러번 소요를 일으켰다.

더구나 빨치산의 활동으로 영광읍 소재지를 벗어난 산간지역은 사실상 치안력이 미치지 못했고 좌익세력은 1946년 추수봉기를 기점으로 증폭됐다가 수그러드는 등 전쟁 이전에도 군경과 여러번 전투가 발생했다. 이후 인민군의 진입으로 영광읍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됐다.

인공 치하에서 지역좌익들은 군경가족이나 공무원, 우익인사, 그들에 동조하지 않거나 불만이 있거나 부유하게 살았거나 사소한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반동분자 또는 의식적 반동으로 규정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연합군, 피살된 후 영광읍민에 보복
1950년 9월28일 유엔군이 영광읍을 지나갈 즈음 9·28 서울수복을 계기로 핵심전선이 북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군민들은 라디오나 삐라 등의 정보를 통해 서울수복 등의 소식을 접하고 전쟁의 상황을 오판하게 되는데 9월28일 때마침 유엔군이 영광읍을 지나간다는 소문에 태극기를 들고 영광군청, 경찰서 앞에서 환영대회를 열게 됐다. 유엔군은 영광지역을 그냥 지나갔고 군경의 치안력은 아직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당시 영광지역은 여전히 좌익세력의 통치하에 있었다.

1950년 9월28일 유엔군의 일부가 군산을 거쳐 영광에 들어왔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부대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와 합동참모본부는 극비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최대한 이 작전을 숨기기 위해 상륙지를 인천이 아닌 군산이라고 흘리면서 특수부대 일부를 군산으로 상륙시켰다.

유엔군은 전략적, 심리적 작전의 일환으로 원산, 또는 군산이나 아산만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마타도어를 비밀리에 흘렸고 실제 이 지역에 상륙한 특수부대는 합류지점을 정하고 그냥 지나가는 교란작전 부대에 불과했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특수부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즈음에 군산에 상륙한 이후 인근에 잠적해 있다가 고창을 거쳐 9월28일 영광읍에 큰 저항없이 도착했다.

영광경찰서 앞에 도착한 이 부대는 군청을 지나 곧바로 떠났는데 사람들은 연합군이 진주해 수복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지나가는 연합군들에게 태극기를 들고 대단히 반겼다고 한다. 이들 중 흑인 병사 5명이 낙오해 좌익 유격대들에게 피살된 후 대마면 월흥교 밑에 묻힌 이후 미군들이 시신을 수습해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로 인해 환영 나온 많은 주민들이 표적이 돼 피해를 입었다. 영광읍은 1950년 10월30일 수복되고 동년 11월19일경 법성면이 수복되지만 백수와 염산은 1951년 3월까지 수복이 늦어졌다.

(2) 백수읍
서해안을 따라 형성된 넓은 간척지와 수산물이 풍부한 전형적인 농어촌지역인 백수읍(당시 백수면)은 17개리 80개의 자연마을에 2,675세대 5,538명(2009년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1949년 백수읍의 인구는 1만7,932명이었다. 백수읍 역시 민간인희생이 많았던 지역이다.

백수읍에서는 광복 이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가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1949년 9월 좌익세력 토벌과정에서 남로당원이나 좌익사상가들이 처형됐는데 장산리의 김○래, 지산리의 김○선, 약수리의 서○종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여순사건 이후 불갑산에서 활동하던 패주한 14연대 반란군들이 갓봉유격대와 합류하면서 백수읍의 좌익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6·25전쟁 전후로 구수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인근지역의 지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백수읍은 해안에 위치해 전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바닷길로 북으로 퇴각할 수 있는 지리적 잇점과 구수산의 지형적인 요인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근 좌익들의 집결지가 돼 수복이 늦었고 경찰가족과 우익인사, 대한청년단, 소방대원, 공무원 가족들의 희생이 많았다.

민간인도 갓봉 피난갔다 희생자 발생
민간인 희생은 군경토벌과정에서도 발생했다. 빨치산의 본거지인 갓봉 인근 지역의 민간인들은 경찰과 빨치산들에게 이중으로 시달리다가 군경토벌이 개시되면서 많은 이들이 좌익 가담여부와 상관없이 갓봉으로 피난하다 사살되거나 바다로 도망가다가 바닷물에 휩쓸려 동사했다. 연이은 경찰의 소개작전 때에도 빨치산 부역혐의 등으로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백수읍은 3,722명의 민간인이 반동분자로 몰려 희생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용서의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홍곡리 지암마을 박남도 일가 27명이 지역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1950년 9월경에 희생됐는데 수복후 경찰과 함께 마을에 돌아온 대한청년단 박남도가 가해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었지만 자기 대에서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복을 단념하고 오히려 대한청년단원 중에 복수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했고 부역혐의자와 빨치산 동조자, 그리고 좌익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구명에 앞장섰다.
그리해 박남도는 주민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아 제2대 전라남도의원에 당선됐고 2004년 영광군에서는 이러한 박남도의 공적을 기려 홍곡리 홍곡천가에 공덕비를 세웠다.

(3) 염산면
세번째로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염산면은 현재 4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기와 다소 차이가 있다. 1983년 오동, 옥실 2개리가 편입됐고 1987년에는 월흥, 반안 2개리가 군남면으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행정편재를 갖추게 됐다.

해안에 위치한 염산면은 일제 때인 1923년 설도의 재방공사와 1927년 진촌농장(양일·합산)·통구농장(오동·옥실)의 간척사업과 염전 등으로 일본인이 거주했고 이주민들도 염산면 일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49년의 인구는 1만1,651명이었고 현재는 2,402세대 5,036명(2009년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불갑산과 군남면의 삼각산·군유산, 염산면의 봉덕산, 백수읍의 구수산, 법성면의 대덕산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서해안에 접해있는 염산면은 주요 좌익사상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염산면에서는 6·25전쟁 이전인 1948년부터 빨치산이 폭력을 자행했고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하기 이전에 북한의 정치공작부대가 해상으로 들어와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산악지대에 잔류하던 일부의 빨치산들과 경찰이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7월24일경 인민군이 염산면을 점령한 직후 염산면인민위원회(○○위원회)가 구성돼 위원장에 김○○, 면 분주소장(면 지서장) 장연묵, 유격대 중대장 김한수 등으로 구성하고 이들이 처음 취한 조치는 우익인사, 대한청년단, 군경 가족 및 인척 그리고 지주와 그들에 동조하지 않거나 불만이 있거나 사감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체포 및 감금이었다. 그들은 붉은 완장을 팔에 차고 행동을 시작했다.

업무계통은 군 인민위 산하의 내무소 → 면 분소 → 리 자위대로 이루어졌다. 우선 인민위원들과 면 자위대원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을 작성해 호별방문을 통한 가택수색과 정보를 통해 은신처를 알아내어 대상자들을 체포·구금했다. 이러한 방법은 인민군 점령 초기에 시행됐던 것으로 이 시기에는 민간인희생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명 ‘생산유격대’라는 지역좌익들이 행동대로 나서게 되면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됐다.

염산면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염산에서는 200여명의 보련가입자가 있었는데 보련원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염산분주소의 주임이었던 김동식이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비소집 이후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해 창고에 갇혀있던 보련원들이 도망갈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좌익들은 악명을 떨쳤다.

라디오 등을 통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흑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영광읍을 지나간 직후 주민들 사이에서는 곧 수복되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6·25사변피살자명부>에 의하면 염산면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해 많은 민간인들이 피살됐다.

생산유격대는 자위대, 치안대와 같은 조직이었다. 면단위에는 면유격대와 면인민위원회가 조직돼 있었으며 생산유격대를 지휘하는 것은 후자였고 그 하부에 지구책이 있었다. 생산유격대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때 희생됐다.

염산면장이었던 김창환과 면사무소 직원이 다수 있었던 장동마을 김해김씨 14가구 80여명, 동산마을의 전직면장 정현택, 박준용씨 일가족 20여명, 신동마을에서는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강성태, 최경식, 이윤행씨 일가족 20여명, 송암리 김해김씨와 광산탁씨 일가족 40여명, 하논마을 안길○의 남은 일가족 20여명, 48년 대무마을 공비토벌 사건에 가담했던 임병협 등은 염산면 봉남리 설도와 군남면 포천리로 각각 끌려가 희생됐고 봉남, 상계, 축동, 야월, 두우, 신성리 등의 군경가족, 공무원, 부호의 가족들, 야월교회 교인65명, 염산교회 교인 77명이 희생됐다. 염산면에서는 지금도 희생자가 보고되고 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전체 희생자의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50세까지의 청장년층이 주로 희생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