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우리에게 숙제로 남은 관현이 형”
“살아있는 우리에게 숙제로 남은 관현이 형”
  • 영광21
  • 승인 2014.05.1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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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선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불갑산 입구에 위치한 불갑테마공원에는 주먹을 굳게 쥔 박관현 열사가 서있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외치며 광주5·18민중항쟁에 불을 지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그는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나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광주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학생들의 직접 선거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돼 5·18민중항쟁이 있었던 1980년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경찰에 수배돼 도피생활을 하다가 체포돼 광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중 그해 10월12일 우리 곁을 떠났다.

“관현이 형이 그랬어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죽자고.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뜻이었겠죠. 그리고 살아있다면 교도소에서 만나 거창한 단합대회를 갖자고 하더라고.”
5·18기념재단 송선태 상임이사는 34년전 그날, 박관현 열사를 떠올리며 목이 메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검정고무신에 허름한 점퍼를 입던 남자
그는 박관현 열사의 비공식 조직으로 5·18항쟁 당시 집회 기획부터 동원까지 총괄적인 책임을 도맡아 했던 핵심 참모진이다. 그가 박관현 열사를 처음 만난 것은 전남대학교에서 학원자율화를 위한 학칙개정을 요구하며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관현이 형은 항상 검정고무신에 허름한 남방에 점퍼, 헐렁한 군복바지를 입고 다녔어요. 함께 운동을 하면서 내가 본 그는 리틀 김대중 전대통령이였어요. 발표도 잘하고 연설도 좌중을 압도했죠. 그래서 그때 저 사람이 총학생회장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마음 속으로.”

결국 이들의 바람대로 학칙이 개정돼 학생들의 선거로 박관현 열사가 첫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목적을 달성한 학원자율화추진위는 해체되고 송 상임이사도 졸업준비를 위해 짐을 싸려던 때 박관현 열사가 그를 찾아왔다.
송 상임이사는 “막걸리집에서 관현이 형을 만났는데 총학생회 공식조직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조직을 맡아달라고 하더라”며 “지금 전남대 총학생회관이 있는 건물 3층에 심리학을 가르치던 노희관 교수가 쓰던 심리검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수정예가 모임을 갖고 집회계획을 준비했다. 여기서 5·18민중항쟁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어 “나중에 핵심인사들이 수배돼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도 이곳은 알려지지 않아 나중에 중요한 자료를 갖고 나오기도 했다”며 “교수직을 걸고 선뜻 심리검사실 열쇠를 내 준 노희관 교수님이 없었다면 5·18민중항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열사비 건립한 영광주민께 고마운 마음
박관현 열사 그가 떠난 지 어느덧 32년이다. 한번씩 불갑테마공원앞 박관현 열사비 앞에 다녀오곤 한다는 송 상임이사는 존경했던 선배의 모습을 새긴 열사비 앞에 서면 많은 생각에 잠긴다.

“지난해 제막식에 참석했는데 참 부끄러웠어요. 같이 활동했던 우리들이 흉상을 만들어 세우자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역에서 관현이 형을 잊지 않고 열사비를 건립해줘서 부끄럽기도 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열사비 앞에 서 있으면 슬프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현재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나 여러가지 사건을 보며 아직 다 이루지 못한 민주화에 대해 살아있는 우리에게 그가 준 숙제로 주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열사비 앞에서 그를 보며 용기를 얻어요.”

35번째 5·18민중항쟁일을 앞두고 시끄럽다.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에서<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주먹을 쥐고 선동하는 노래다, 특정정당이 애국가 대신 부른다 등 제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내세운 이유는 많다.
5·18기념재단을 비롯한 5월단체 등은 기념식 행사에 불참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 18일 새벽 안산시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합동분향소에 다녀오기로 했다.

3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5·18민중항쟁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한 정당의 대변인은 이같은 논란을 두고 “돌이켜보면 매년 5·18은 언제나 항쟁을 현재로 살아가는 이들의 저항과 과거의 박제로 남겨두려는 자들의 기념식으로 갈라져 있었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누군가 과거의 박제로 치부해 버린 5·18정신과 박관현 열사의 정신은 아직 여기, 우리 옆에 살아있다.
이서화 기자 lsh122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