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획에 그와 함께 있었다
역사의 한 획에 그와 함께 있었다
  • 영광21
  • 승인 2017.06.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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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이한열 열사 껴안은 영광출신 이종창씨

6·10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당시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홍농읍 출신인 이종창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이한열 열사를 부축한 사진 1장으로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진 이종창씨.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며 30년째 6월이면 이한열 열사를 떠올린다는 이 씨의 인터뷰를 발췌해 요약·게재한다.                                                                   
/ 편집자 주

30주년을 맞은 6월 민주항쟁의 역사 한페이지에 이한열을 우연히 발견하고 부축한 이종창(51)씨가 자리잡고 있다.
이씨는 1987년 6월9일 연세대 앞 반정부 시위 당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직후 그를 부축했다.
당시 보도된 사진을 보면 이종창씨는 최루가스에 견디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 머리에서 왼쪽 볼을 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이한열 열사를 두 팔로 안고서 시위 진압에 나선 전경대 쪽을 긴장 속에 응시하고 있다.
“뿌연 최루가스 속에 사람이 쓰러진 것을 스치듯 발견했습니다. 많이 다친 줄은 몰랐습니다. 본능적으로 부축해 옮겼습니다.”
당시 연세대 도서관학과(문헌정보학과) 2학년이었던 이 씨는 경찰이 본격진압에 나설 때 학우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는 ‘사수대’였다.
경찰은 보통 최루탄을 다량으로 발사하고 학생들이 흩어지면 전경대를 진격시켜 진압에 나선다.
그날 전경들은 학생들이 미처 달아나기도 전에 진격을 시작했다고 이 씨는 전했다. 다급히 전경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서 돌아선 순간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으로 힘없이 늘어지듯 쓰러진 학우 1명이 보였다.
이 씨는 앞뒤 잴 것 없이 돌아가서 그를 부축해 잡아끌었다. 다른 학우들이 모인 곳까지 옮기고서 이 씨도 정신을 잃었다. 자신이 부축한 이가 경영학과 2학년 과대표 이한열이라는 사실은 저녁에야 전해 들었다.
이 열사를 부축한 이 씨의 모습은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에게 포착됐고 이 사진은 이 씨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졌다.
30년이 흐른 지금 이 씨에게 이 일은 영광이 아니라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다.
이 씨는 이 열사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둘 다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나왔고 종로학원에서 함께 재수한 사이라는 건 그도 신문기사로 알았다.
의도하지 않게 생긴 인연은 어떤 죽마고우보다도 질겼다. 사진으로 함께 역사에 남았을 뿐더러 이 열사가 쓰러지고 닷새뒤 이 씨도 전경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바로 옆자리에 이 열사가 누워 있었다.

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가 “네가 한열이 안았던 친구니”하고 인사를 건넨 후 이 열사가 아직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씨가 두차례 뇌수술을 받고 21일만에 퇴원하려 한 날 이 열사가 숨을 거뒀다.
이 씨는 충격을 받고 다시 병상에 누웠다가 나흘뒤 병원 문을 나섰다. 그 날이 마침 7월9일 이 열사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 씨는 “오전 장례식만 보고 고향에 내려갔다”며 “문익환 목사의 ‘열사여!’ 연설과 한열이 어머님 연설…. 그 외엔 눈물 흘린 기억밖에 없다”고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씨에게 이 기억은 지우기 힘들었다. 졸업후 학생운동을 뒤로하고 도서관 사서가 됐지만 매년 돌아오는 6월은 그를 이한열과 함께 살게 했다.
그는 ‘역사는 흐른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 촛불집회에 참석하면서 이를 새삼 느꼈다고 했다.
큰딸의 손에 이끌려 12월에야 처음 나간 촛불집회에 전국 232만명이 운집했다. 6월 항쟁때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보다 더 많다던 헌정사상 최대 규모인 6차 촛불이었다. 이 씨는 딸과 함께 1987년에는 가지 못한 청와대 앞까지 행진했다.
이 씨는 “대학생 때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품었다. ‘역시 그렇구나’ 하고 이번에 다시 한번 생각했다”면서 “폭력을 내려놓고 평화를 들자 청와대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시위문화가 변했고 역사가 변했다”고 말했다.
역사가 흐르고 지난 자리는 자주 돌아보지 않으면 잊히기 쉽다는 게 이 씨의 믿음이다. 이 씨가 이따금 고향인 영광에 내려올 때면 광주를 들러 이 열사가 묻힌 망월동 옛 5·18묘역을 찾는 이유다.
그때 이후 서른번째 6월을 맞으며 이 씨는 “30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사실 실감 나지 않는다”고 되뇌었다.  
“30주년을 맞아 국민들께서 한열이의 죽음이 가진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떠올리는 6월이 됐으면 합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