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의 대하소설 파시
서주원의 대하소설 파시
  • 영광21
  • 승인 2021.11.1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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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2 - 1. 갑신년 중추 칠산바다의 월식 ⑫

죽막동 갯가엔 고깃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달이 뜬 오늘 야밤에 한척을 훔쳐 타고 출항하잡시고 주뱅과 앙얼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실은 어젯밤, 출항할 참이었다. 그런데 마을 앞 포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 인적이 뜸해지자 주뱅과 앙얼은 점찍어 둔 배에 올랐지만 벌써 썰물이 나서 배 바닥이 갯벌에 닿은 뒤였다. 
날이 샐 무렵, 두 사람은 죽막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계곡에 몸을 숨긴 뒤 잠들었다. 점심나절까지 잠을 잔 두 사람은 다시 갯가로 나왔다. 일단은 수성당에 숨어들어 먹을거리를 찾아보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죽막동 갯가의 배를 훔칠 작정이다.
주뱅이 수성당 당집의 좁은 앞뜰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긴다. 시누대 사이로 흘러든 달빛이 쏟아지는 앞뜰은 주뱅에겐 낯선 땅이 아니다. 눈을 감고도 앞뜰을 가로질러 당집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주뱅은 수성당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떠돌이 해적은 풍찬노숙을 면하기 어렵다. 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을 자야 되는 주뱅과 앙얼은 외딴 당집에 들어가 잠들 때도 있고, 농가 외양간에 숨어들어 집짐승과 잠자리를 다툴 때도 있다.
수성당 아래 여울굴은 주뱅과 앙얼이 1년에 예닐곱 차례씩 숨어드는 단골 은신처다. 죽막동 사람들은 물론 격포진 관원들조차 성지인 수성당 주변의 출입을 통제하는 터라 여울굴은 칠산바다의 몇몇 해적들에겐 감쪽같은 은신처로 애용된다.
다른 해적들보다 주뱅과 앙얼이 여울굴을 은신처로 이용하는 횟수가 몇배 많은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다. 
변산반도 서쪽 끝머리인 격포진은 두 사람의 고향인 위도와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뭍이다. 그러다보니 격포진 관할인 수성당 아래 여울굴은 낯선 타관살이에 삶이 찌들고, 단 하루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인 주뱅과 앙얼에겐 어머니의 품속 같은 영혼의 안식처다.
여울굴에 숨어들어 지친 몸을 숨기고 나면, 주뱅과 앙얼은 아늑함을 느낀다. 봄이든 가을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여울굴 안에서 바라보는 위도의 노을은 시름을 달래주고, 객사의 공포도 지워준다. 
오늘같이 달이 뜨는 밤에 아련하게 건너다보이는 위도의 야경은 개똥밭 같은 이승의 삶을 일찍 접고 먼저 저승으로 건너간 집안 어른들의 얼굴도 떠오르게 한다. 그 옛날 꼬맹이 때, 할머니나 어머니가 품에 안거나 무릎에 눕힌 뒤 따독거리며 들려주었던 자장가를 환청으로 들으며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그 환청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고, 외롭고 배고픈 갈매기 울음소리고, 시누대가 바람에 바스락대며 함께들 울어대는 소리인데 말이다.
주뱅과 앙얼은 소싯적에 고향인 위도 하왕등도를 떴다. 한날한시에 칠산바다 해적으로 나선지가 벌써 수십 년째니 두 사람이 여울굴에 몸은 숨긴 횟수는 손가락으로 셈하기도 벅차다.
수성당 당집 처마 밑으로 비껴든 달빛이 앞뜰로 들어서는 주뱅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촛불이 흔들리는 당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깜짝 놀란 주뱅은 잽싸게 앞뜰 왼편 시누대숲으로 몸을 숨긴다.
‘으따 씨발 사람 미치게 허는고만 잉! 저 안에 든 것이 사람이여, 구신이여?…’
이런 생각이 들자 주뱅의 사지는 벌벌 떨린다. 이빨도 덜덜 떨리고, 비수를 꽉 틀어쥔 오른손도 부르르 떨린다.
“오메, 어찌야 쓴당가? 구신이 아니고 사람이네 잉!”흔들리던 촛불을 끄고, 당집 안에서 나오는 여자 두명을 보고 주뱅이 입 밖으로 뱉어낸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지만 당집에서 나오는 두 여자의 귀에 들릴 만큼 큰소리는 아니다. 웅얼거리는 혼잣말이다.
당집 앞뜰에 선 두 여자에게 들킬세라 시누대숲에 몸을 숨긴 주뱅은 들숨조차 조심스럽게 들이킨다. 여차하면 칼부림이라도 해야 될 긴박한 처지인지라 비수를 틀어쥔 오른손을 다시 한번 꽉 쥔다.  
‘대관절 묻 허는 년들여? 분명 꼬랑지가 아홉 개씩 달린 백여시는 아닌디 말여!…’ 주뱅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두 여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다. 갓 나온 달이라 그 빛엔 아직 어스름이 남은 데다 먼빛으로 살피자니 두 여자의 이목구비는 분간하기 어렵다.
주뱅이 어렴풋하게나마 추정하자니 손에 큼직한 보따리를 들고 당집 안에서 먼저 나온 여자는 나이가 좀 들어 뵌다. 50대는 됨직하다.
뒤따라 나온 여자는 20대나 30대로 보이는데, 몸태가 별나다. 임신을 했는지 배가 남산만하고, 해산일이 코앞인지 어깨로 숨을 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