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 ②
■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 ②
  • 영광21
  • 승인 2023.12.1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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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친 활동에도 미서훈자 서훈자 보다 4배 많아
강력한 의병 저항에 일제 1909년 남한 폭도 대토벌작전 강행 … 전남 의병 사상자 4,241명 

영광문화원(원장 김범무)이 11월29일 <영광지역 한말의병 인물 발굴 학술회의>를 개최해 과거 구한말 영광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활동과 인물들에 대한 고찰을 실시했다. 
학술회의는 조선대 이정선 교수를 좌장으로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노기욱 호남의병연구소장)의 기조발표를 시작으로 영광 내륙지역과 연해지역 한말의병 활동(김상욱 박사), 영광지역 한말의병 활동 문헌사료 검토(박용규 전 고려대 교수), 영광지역 한말의병 활동 일본측 사료 검토(전 동경대 연구원), 영광지역 한말의병의 생가와 문화유산 등 4개의 주제발표가 이뤄졌다. 
본지에서는 기조발표된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의 주요내용을 발췌해 당시 활동했던 의병들을 인물사를 조명해 본다. / 편집자 주


김원국(金元國, 1873~1909) 호는 석포. 본명은 창섭. 이명은 원국元局. 동생 김원범이 일본군경에 의해 희생되자 동생의 복수를 갚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의 동생은 호남창의회맹소에서 가담했다가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한 후 조경환 의병부대의 도포장,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활약했었다. 김원국은 1908년 후반 의병장 조경환을 만나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조경환이 순국하자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곽진일을 선봉장, 오덕신을 중군장, 김재연을 후군장으로 삼았다. 이들은 주로 어등산,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청량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선봉장 곽진일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목촌에 은신하여 치료하던 중 1909년 6월15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광주에서 재판을 받아 대구로 이송되어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김형식(金炯植, 1870~1910) 본적이 영광 대마 원흥 447번지이다. 1870년 6월17일 대마면 원흥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상산이며,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이명異名으로는 김성식金聖植과 김군칙金君則이다. 송사 기우만의 문인인 김용구가 집안의 조카이다.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해 활동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국권을 상실할 위기 속에 다양한 항일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에 대응하였다. 1906년 족질族姪 김용구와 함께 기삼연을 찾아가 복수토적復讐討賊을 기치로 한 일심계를 조직하였다. 
1907년 8월 족질 김용구가 영광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박용근, 오태윤, 이영화, 정희면, 이종택 등과 함께 김용구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곧바로 영광읍을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9월 중순 김용구 의병부대가 기삼연 의진에 합류한 뒤 9월24일 전남 서부지역 의진들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구 의병부대에 합류한 뒤 1907년 8월12일 영광읍 성내城內에 이르러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후 화개 방면으로 이동해 행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화개, 연곡사, 남문, 안치 등지로 이동하였다. 영광군 대마면과 태청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병업(朴炳葉) 사창社倉의 적 주둔지에 잠입하여 적병들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전해산진全海山陣으로 들어갔다. 포사대장砲射大將으로 임명되어 석문전에서 적 기병 30명을 전멸시키고 영광, 함평의 도처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영광 묵동에서 적탄에 맞아 입절立節하였다.

박도경(朴道京, 1874~1910) 이명 박포대朴砲大이다. 성재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당시 박도경은 성재 의진에서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통령에 김용구, 참모에 김엽중, 김수봉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성재 의진은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1907년 9월 영광에서는 포대(포사대장)로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본진을 세우고 스스로는 포사장이 되었다. 
1908년 4월 김용구가 교전 중 총상을 입자 군권을 이양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1909년 2월에 부하 박이일이 체포된 후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이도운, 중군장 손도연, 도십장 구연역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고 한다. 무기는 총 139정, 칼 24본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였다.
1909년에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20일에 부하 100여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3월18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 약령시藥令市가 열렸으므로 많은 북도의 상인들이 모였는데 이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祭奠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영근(朴永根, 1882~1910) 본관은 함평. 광엽의 셋째 아들로 출생. 일찍이 이웃인 마산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무신戊申에 왜적의 발호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죽봉 김태원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고창, 영광, 함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도처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김태원 장군이 순절한 후 김해산 부대의 호군장이 되었고 의병을 빙자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렸다. 
3년여 동안 대명동전투를 비롯하여 대안촌, 고막원, 석문안 먹골 대치전투에서 대승을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어찌할 수 없어 1909년 3월 전해산은 부대를 해산하고 귀향하였다. 그후 재기하여 영광 건두산과 불갑산에서 수차 왜적과 교전하였는데 왜적에 포위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1910년 7월14일 전해산 장군과 함께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절하였다. 196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함평공원에는 군민들이 세운 순절비가 서있다. 

박판동(朴判同, 1887~?) 1907년 9월 장성에서 의병장 기삼연이 주도하였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무기와 식량의 조달을 책임졌다. 1907년 9월3일 고창 문수산 전투에 참가하고, 12월10일 흥덕 길마전 전투에 김용구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무동촌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8월7일에는 고부군 답내면 장춘리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2년 9월13일 징역 3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백학명(白鶴鳴, 1867~1929) 근대의 명승名僧. 속성俗姓 백씨白氏, 법명法名 계시啓示, 법호法號 학명鶴名, 자호 백농白農, 영광 출신. 백락해의 아들, 모는 박씨朴氏. 어려서 그 총명이 비범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학업을 중도에 폐하고 필상筆商으로 겨우 가계를 이을 정도였다. 20세 되던 해 양친을 잃게 되자 실의로 각처를 방랑하다가 순창 구암사에 들어가 당시의 고승 설두화상의 설법에 감명을 받고 출가를 결심, 향리로 돌아와 불갑사 금화화상의 상좌가 되었다. 
이후 벽송사·선암사·송광사에서 수도하고 34세 되던 해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 금화화상의 뒤를 이어 강사講師가 되었고 얼마 지나서 참선으로 도를 깨달았다. 1914년 중국·일본의 명찰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다음해 변산 내소사 월명암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1923년 고찰 내장사 벽연암이 퇴폐하자 당시 백양사의 송만암 선사의 권유로 내장사 주지가 되었다. 
학명선사는 3년 동안 벽련암의 불전을 세우고 경내에 흩어져 있던 부도를 현재의 부도전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산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담이 80두락에 이르고 항상 제사들에게 반선반농半禪半農을 가르치며 놀고먹는 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일렀다. 그리하여 스스로 호를 백농이라 하였다. 
또 인근의 동암동녀를 모아 조석예불을 가르쳐 불리佛理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시문에도 능하여 인생의 무상無常과 불리佛理의 자비를 노래한 원적가·왕생가·신년가·해탈곡·선원곡·참선곡·망월가 등이 유명하여 이밖에 백양산가白羊山歌 등 한시가 있다. 입적 후에 70개의 백색사리와 영골靈骨이 나오는 이적異跡이 있었다. 1935년 주지 고벽이 정호鼎湖의 찬 몽련당 글씨로 사리탑비舍利塔碑를 부도전에 세웠다. 

서종채(徐種採, 1881~1916) 항일의병. 이명 응오, 종주, 고창 출신. 1907년 40명의 의병을 소집하여 활약하다가 기삼연의 진에 합진하였다. 1908년에 이대국, 이병장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고 의병장이 전사한 후 200여명으로 부대를 재편성하여 함평, 영광, 무장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적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마침내 일군에게 체포되어 1913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동년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1916년 4월22일 대구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오태윤(吳泰允 1880~1909) 영광 사람이다. 1906년 봄에 김용구와 함께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일심계를 조직, 동지들을 규합하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07년 8월 김용구가 기삼연과 함께 거의하게 되자, 김형식과 함께 의병 수백명을 

소모召募하여 영광읍 성내城內에 이르러 일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패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며 구례 연곡사와 하동 화개 등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같은 해 12월2일 연곡사, 화개, 오동, 남문 등지에서 좌익에 김창복, 호군에 박용근, 참모에 봉제화가 각각 임명될 때 종사에 임명되어 일군과 2시간여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둔 뒤 다시 염광 염치로 이동하였다. 이후 송치·영광·장성·고창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기창(李基昶, 1871~1908) 본명은 인제이다. 1907년 7월 일제의 강요로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단행되게 되었다. 이에 이기창은 기삼연, 김준, 김태원, 김용구와 의병 거사 문제를 상의하였다. 이기창은 호군장으로 임명되어 8월에 장성, 영광, 나주, 함평, 고창 등지에서 수차례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장성 황룡면 탑정리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대극(李大克, 1875~1909) 한말 의병장. 영광 대마 남산 771 출신이다. 본명은 순식. 자는 영화. 호는 대극. 1906년 영광 마치산에서 기병하여 영광읍 병기를 탈취해 무장하였다. 이듬해 기삼연이 주도한 호남창의맹소의 도포장이 되었다. 이대극은 무장, 고창, 법성포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는 기삼연이 맹주로 있던 호남창의맹소 의병진이 추월산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받고 해체되자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대극 의병진은 고창 고산에서 적의 기병을 유인하여 복병으로 격파하였고, 영광 불갑산 연실봉에서 포위 공격해오는 적을 바위에 의지하여 패주시켰다. 
불갑산 전투에서는 적의 공격을 받아 격전 끝에 선봉장 이백겸이 전사하였고, 무장 임자산 전투에서는 신임 선봉장 강필주가 전사하는 등 사상자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불갑산과 장자산에서 연승하고 장자산에 은둔하면서 분전하였다. 1909년 5월 일본군경의 독수에 걸려 피살되었다. 의병의 훈련과 정예한 무기의 중요성을 설파하여 한말 의병의 장기항전의 기틀을 세웠다. 
이두헌(李斗憲) 자는 영준. 호는 남파. 본관은 함평. 함평 출신. 28세 때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특히 전수용 의병장 막하에서 참모장이 되어 불갑산, 영광 등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후 전세가 불리하여 산중에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어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철형(李哲衡, 1873~1918) 한말 의병장. 이명은 철형. 1907년 9월 장성에서 기삼연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자 진사였던 그는 군사를 이끌고 이에 합류하여 중군장이 되었다. 또한 기삼연. 김용구, 전수용, 이석용, 김준, 이남규 등과 함께 국민들에게 항일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로 발송하는데 참여하였다. 
11월3일 영광군 진량면 산하치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법성포에 이르러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10여명을 사살하고 일본인 거주 가옥 10여채와 무기를 불태웠다. 11월19일에는 김용구 등과 함께 영광읍성 남문을 공격하여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1908년 1월19일에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였으나 쌍방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07년 9월 이후 1909년 1월까지 장성, 함평, 영광, 고창 등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6년 8개월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삼휴(鄭三休) 영광 출신. 전해산진全海山陣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잠행사찰潛行査察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장성헌병대에 잡혀 순국하였다. 

임선행(林善行, ?~1908) 김용구) 의병장 의진에 참여하여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월19일 장성군 탑정리에서 일병과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희면(鄭熙冕, 1866~1945) 1906년 봄 국권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김용구가 일심계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할 때 여기에 동참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1907년 8월에는 기삼연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김형식, 박용근, 오태윤, 이영화 등과 함께 의병을 소모하는 한편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10월 일제가 수백명의 군중을 모아 놓고 의병장 김용구의 집에 방화할 때 붙잡혀 광주로 이송되었다. 1908년 봄 유형流刑 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같이 강력한 의병들의 저항에 봉착하자, 일제는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획책하였다. 1909년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남한대토벌 실시계획’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해당구역은 전라남북도 하에 있는 장화도, 부안, 태인, 갈담, 남원, 화개, 하동, 고포를 연결한 선의 서남지구 및 연안·제 도서로 규정하고 있다. 
제1기에는 장화도, 부안, 태인, 갈담, 남원, 화개, 하동, 고포를 연결하는 선과 법성포, 영광, 삼거리, 서창, 능주, 보성, 서동, 소록도, 각석도, 황제도를 연결한 선과의 중간지구를 토벌하는 것이다. 제2기는 법성포, 영광, 삼거리, 서창, 능주, 보성, 서동, 소록도, 각석도, 황제도를 연결한 선으로부터, 서남해안에 이르는 전 지구하는 계획이었다. 
특히 제3기는 남단 서남해 일대의 제도서 전부르 토벌하는 것이었다. 토벌개시는 1909년 9월 1일 실시하여 약 40일간 3기로 구분하였다. 제1기 약 15일, 제2기 약 15일, 제3기 약 10일로 정하였다. 토벌지구의 포위선 형성과 소요 지점 수비는 제1경비부대가 맡았다. 그리고 포위선 내에서 토벌 수색 검거는 제2행동부대가 실시하기로 하였다. 20세 이상 60세 이하자를 조사하고 또 각 가옥을 임검하는 것이었다. 보병제1·2연대가 동원 되었다.
남한대토벌 실시계획에서 영광과 법성포는 그들의 토벌 시작점으로 피해가 증가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부분이다. 일제는 1909년 9월1일 2,260명의 대병력을 투입했을 뿐 아니라, 이외 현지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고 또 서남해안에는 해군수뢰정대를 동원하였다. 당시 무도 포악한 야만성으로 이름이 높던 일본군은 도처에서 그들의 야만성을 발휘하면서 호남을 동북에서 서남으로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해안선에는 육지에서 밀려오는 의병들을 잡기 위해 수뢰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때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끌던 의병장 김용구를 위시하여 전수용, 심남일, 임창모, 안규홍 등 모두가 비전고투悲戰苦鬪 하였다. 결국 전남 의병장 103명이 체포되거나 전사하였다. 의병 4,13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이들 의병들을 강도살인죄로 몰아 처형하고 나머지는 도로공사 등에 강제 노동을 시켰다. 
여기서 일본군이 겁탈한 의병 소지품 중 <폭도가맹자명부(1908년 2월1일)>에는 영광의병이 다수가 표함돼 있다.
영광의병은 국권 회복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지식인에서부터 하층부에 이르기까지 협력하여 일제를 막아냈다. 내륙에서 영광읍성 탈환과 연안의 법성포 항구에서 적을 축출하기 위하여 수륙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제를 격살하고 불태웠다. 결국 영광의병의 무력 항쟁은 일제의 식민지 침탈을 늦추는데 일정부분 기여하였다.
노기욱 / 호남의병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