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인들과 무인들 모아 새로운 역사와 의미 재조명하자
■ 역사의 산실 융문당·융무당
2008-11-14 박은정
성례원찻집, 영산사무소 등을 지나 주변정리가 한창인 옛 건물과 마주했다. 왕을 비롯해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화를 열었던 곳으로 조선 전기 경복궁 후원 서현전과 용도가 같으며 고종 때 경무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의 중심 건물인 융문당이 바로 그것.
또 백수읍 대신리 옥당박물관에 위치한 융무당. 융무당은 과거시험의 무과와 활쏘기시합 군사들의 교체훈련 및 사열에 사용했던 건물로 조선전기 경복궁 후원의 충순당과 같다. 융무당은 고종 5년(1868년)에 신무문 밖 북한산 기슭의 경복궁 후원지역(현재 청와대)에 중건된 건물이다. 융무당과 융문당 일대의 넓은 공터는 후원의 다목적 공간으로 국가에서 과거를 치를 때와 무술대회를 열 때 시험장으로 활용됐다. 특히 융무당은 건물을 헐어다 한강로의 일본인 절에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했으며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의 관저를 지었다.
융문당 융무당은 역사의 산실
조선개국과 더불어 경복궁이 완성된 것은 세종 8년(1426년)이며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됐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등 각종 정각, 누각과 함께 연무장과 과거시험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경복궁과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됐고 경복궁과 그 후원인 청와대 일대는 그런 상태로 270년간 방치됐다 고종2년(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중건됐다. 고종은 현재 청와대 지역인 신무문 밖의 후원을 북원이라 이름 짓고 중일각 , 오운각, 융문당, 융무당, 춘안당 등을 세웠다. 또한 이와 함께 건축돼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데 된 경무대를 두었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잇게 됐다.
궁궐 건축양식 확인할 수 있는 가치 높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해방후 1946년 원불교가 인수해 2006년 11월까지 원불교 서울교당 교화장소로 사용되다 교당의 신축과 관련해 2007년 이 두 건물은 해체돼 융문당은 영광에 위치한 원불교 영산성지로 이전됐고 융무당은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의 부속건물로 복원됐다.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해 문화재청은 2006년 6월26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으며 이 두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되는 건축물로 조선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 가치가 높다.
현재 세계는 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에서 정신문화를 추구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물질적 풍요에 치우치는 첨단화된 산업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나 명예보다 육체의 건강과 조화로운 결합을 통해 삶의 행복을 지향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지역에 남겨진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가치창조에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인터뷰 / 원불교 김성근 교무
“문화유산 활용해 세계인 모으자”
“신령적인 빛이 감도는 영광은 무한한 잠재력이 많은 곳이라 생각한다”며 영산성지에 위치한 융무당을 소개하는 원불교 김성근 교무.
그는 “옛 문관과 무관이 과거시험을 치르던 장소인 융문당 융무당이 영광에 복원돼 있다는 것은 문화적 활용가치가 높다”며 “옛 과거를 치르는 모습을 재현해 전국청소년휘호제, 무술대회 등 전통이 살아 있는 이색적인 대회를 개최한다면 전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지역문화의 새로운 관점이 될 것이다”고 문화가치를 역설했다.
그는 또 “영광군은 원불교성지와 불교도래지, 기독교순교지 등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종교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다”며 “이러한 문화유산을 이용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세계종교문화엑스포를 개최한다면 새로운 관광사업으로 부각될 것”이라며 특정 종교에만 맡기기 보다는 행정과 주민이 합심해 관리·보존하고 관광산업으로 이어가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은정 기자 ej095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