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읍 도동리 옛우시장터가 분명한 순교지”

천주교 순교지 교계 문화 향토사적 관심 증대 조만간 학술용역 결과물 도출 예정

2009-03-16     영광21
천주교도를 박해한 대표적 사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당시 영광지역에서도 순교한 사실이 조만간 학술적으로 고증될 예정이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됐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는 사교·서교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와중에 영광지역에서도 순교자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관련 교계의 <한국천주교회사> 등 공식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영역에 머물던 순교 사실이 최근에는 문화적 영역뿐 아니라 향토사적 영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구체적인 순교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시대적 지리적 여건을 토대로 향토사학자인 조남식 전영광문화원장이 순교지가 영광읍 도동리 일대의 '옛우시장터'라고 밝혀 관심을 끌고 있다. / 편집자 주

■ 신유박해 영광 천주교 순교지 어디인가
필자가 <영광21>신문에 천주교 순교(절)지 관련 글을 투고하게 된 동기는 첫째는 현재 <영광군지> 편찬에 임하고 있기에 작년 7월경 신창섭 전영광군수 직무대행 부군수와 작년 12월 중순 영광군의 용역을 맡은 국토정보기술단(주) 문병채 대표이사(도시계획박사) 등의 접견에 의해 이뤄지게 됐다.

208년전 신유년 천주교 박해 당시 영광출신 순교자 4~5명이 순절한 사실은 사료에 의해 밝혀졌으나 순교(절)한 장소가 명확하지 않아 구전으로 그 당시 상황을 추리해 확정할 수밖에 없으나 영광읍 도동리 인근의 옛우시장장터에서 참수한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영광문화원을 창립(설)후 36년간 원장을 역임하였고 본원 부설 영광향토사 연구소장을 현재까지 40년간 역임하고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지방사료조사위원, <영광군지> 편찬소위원회 겸 총괄 편집(집필) 담당위원으로서, 천주교(세례명 미카엘) 신자로서 이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영광의 지리적 상황은 신작로(新作路)가 개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영광읍 학정리 ‘방고개재(당시 방고시)’를 거쳐 현 해룡중·고교와 비룡양로원 사이의 고개길을 거쳐 현재 영광읍 도동리 소재 ‘홍교’가 있는 곳이 영광읍내 첫 관문(입교문)이었다.
또 현 천주교 앞길(현 당산나무)과 현 매일시장을 거쳐 ‘남문’(현 우체국)을 그 당시는 남문~북문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편 곧올재길이 통로로 장성과 전북 고창을 왕래했었다.

가장 많이 모인 ‘장날’선택
그 당시에 순절시킨 장소를 선택하였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장소인 ‘우시장터’와 일반 잡상, 어장 등 장날을 선택하였음은 분명 명확하다.
필자의 집도 영광장터(우시장·잡상터) 인근에 있었고 그 당시 우시장 인근 한문서당(향숙)에서 필자가 9세까지 소학을 마친 후 영광공립보통학교에 입학·졸업했었지만 당시 75세의 서당훈도 선생님으로부터 천주교도의 박해 처형 상황도 전해 들었다.
또한 현 천주교 근처에서 59년 동안 거주한 정태복(88) 영광군 전산림과장도 208년전의 ‘처형사건을 구전으로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시장에서 500m 인근 거리에 424년전 건립해 숭노(崇老)정신을 함양키 위한 남극재 노인당 조종율(95) 현회장과 서용주(80) 현 부회장도 남극재는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천주교와는 배타적이지만 남극재의 전임 임원들로부터 구전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영광우시장 성황은 교통요충지역으로 인근 무안, 함평, 전북 무장, 고창, 장성 등 지역에서 영광 장날엔 사람 왕래가 비좁을 정도로 성황하였다고 한다.
항시 우물이 마르지 않은 큰 공동샘이 있고, 공동샘 옆에는 하천이 있어서 참수후 칼등의 도구를 씻을 수 있는 곳이었고, 참수하여 장기간 효시(效示)역할을 위해 머리만을 걸어 놓을 당산나무가 있는 곳 등을 살펴 본다면 ‘옛 우시장터’가 참수 장소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의 부모님도 천주교인(부 : 요셉, 모 : 요안나)으로 영광 우시장 장터 근처에서 음식점을 경영하였기에 처참한 처형 장면을 구전에 의해 전해들은 대로 잊지 않고 계셨다.
처형장소는 우시장 장터였음이 분명하고 처참하게 참수한 후 머리만을 208년전의 ‘당산나무’에 효시해 지속적인 선전(홍보)효과를 거두기 위한 조치까지 취하였다는 설이 전승된 것을 보면 그 당시 ‘우시장장터’였음은 다시 한번 분명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설이 전승된 것은 순교(절)자를 하느님 곁으로 승화시켜 다시 부활시켜 하느님의 은총의 빛이 이곳에 내려져 영원히 빛나도록 208년전 없었던 그곳에 영묘(靈妙)한 신령스러운 빛고을답게 영광에 천주교당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은 불교의 뜻인 인과응보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천주교도 순교(절)유적지의 성역화해야 영묘(靈妙)한 신령스러운 영광으로서의 영광(榮光)으로 번영된 고장이 되어 천년의 빛고을로서 직·간접적으로 지역경제적 효과는 물론 방문객 쇄도로 영광의 미래는 밝게 될 것이 분명하다.
조남식 / 전영광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