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할 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여길 못 떠나”

박수영 <백수약방>

2009-09-11     박은정
조제되어 있는 의약품을 판매하는 곳인 약방. 교육 여건이 지금 같지 않아 약사가 귀하던 시절 약국보다 더 많던 것이 약방이다. 지금은 인적이 드문 시골이나 지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잡지 한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약방을 백수읍 소재지에서 만났다.
간판도 없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오래된 약장과 팔순을 바라보는 주인장이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박수영(78)씨. 그는 56년째 백수약방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으로 허리가 굽어 있었다.
박 씨의 시아버지도 의사를 지냈고 남편 또한 병원에 근무하다 약방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해 약국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박 씨의 남편은 결혼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약방을 보기 시작한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제가 약의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었지만 찾아온 손님들에게 몸이 불편한 남편이 말해주는 대로 약을 지어 주었지요”라는 박 씨.

그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시부모님도 모시고 살았지, 아이들은 고만고만하지, 약방도 보아야지 그러다보니 제대로 외출 한번 할 수 없었다”며 “그래도 약방을 운영해 7남매 모두 공부시켜 출가시켰으니 약방은 고마운 삶의 터전이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렇게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며 살아온 박 씨는 10년전 남편과 사별했지만 그 이후도 약방의 문을 열어 놓고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고작해야 드링크와 상비약 정도만 갖추고 있지만 그래도 우선 급할 때 찾아오는 주민들이 있어 쉽게 약방의 문을 닫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 그만하라는 자식들의 성화로 남아있는 약만 팔고 내년쯤에는 아들 며느리가 있는 영광읍으로 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박 씨는 슬하에 6남1녀를 두고 있으며 수의사, 경찰, 공무원 등 모두 반듯한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소학교(현 초등학교)를 마치고 법성중학교를 1회로 졸업한 박 씨는 당시에는 그래도 제법 배운 여성으로 통했지만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하며 지극히 평범한 여성으로 개인을 희생하며 살았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오랫동안 남편을 도와 약을 지어왔던 박 씨는 웬만한 증상에는 어떤 약이 필요한지 ‘척척’ 찾아낼 수 있는 반 약사가 다돼 있었다.

인터뷰 내내 고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박 씨. 수줍은 말투와 손톱 끝에 붉게 물들인 봉숭아가 아직 소녀적인 감성을 드러내고 있는 박 씨는 시대의 마지막 ‘약방할머니’로 정겹게 남아 있었다.
박은정 기자 ej095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