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선생님’
특집 - 스승의날 기념
2004-05-13 영광21
졸업식장 격려가 평생 교육의 밑거름이 돼…
올 해 제23회를 맞은 스승의 날 지금의 나를 이만큼 설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주신 보고 싶은 선생님, 그리운 선생님이 계시다. 1958년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한 학년을 담임하시면서 우리들 개개인을 너무나 사랑해 주신 선생님을 지금도 잊지 못한 것은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일일이 해 주셨다. 물론 시골에서 도시로 중학교를 진학하는 내게도 “너는 항상 너무 순 하니까 광주로 이제 중학교를 가면 조금은 더 똑똑해야 한다. 그리고 친구들과도 때로는 싸우기도 할 것이다. 그 때는 지지 말고 이겨야 한다. 너는 꼭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선생님께서는 그 후 광주에서 교장선생님으로 퇴임을 하셨다. 내가 교사가 되어 졸업식을 맞이할 때마다 한번도 잊을 수 없었던 그 때 그 졸업식.
지금은 많이 변해 버린 현실에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내가 담임 맡은 아이들에게라도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의 덕인 것 같다.
“선생님 자주 찾아 뵙지 못하지만 건강하게 잘 계시지요. 그 때 저희들을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이 지금 저를 지탱해 주고 있고 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도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은혜임을 잊지 않습니다.”

백발의 은사님을 그리워하며!
산야의 아카시아 향내음이 길가던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5월의 계절을 맞이하면 5월15일 스승의날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교편을 잡은 지 어언 30여년.
스승의 날을 맞이하면 어쩐지 지난날 부족했던 사도의 모습들이 뇌리에 스치면서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스스로 자신이 걸었던 길을 반성해본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전 초등학교 시절의 잊지 못할 은사님의 그림자가 늘상 교편을 잡는 나의 앞길에 정신적 길잡이가 되어 외길을 걷도록 도와준 점은 퍽 다행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백발이 되어 정년퇴임을 하셨지만 코흘리개 농촌촌놈들을 열정을 다해 지도해주시고 특히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학습준비물을 준비하지 못한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시면서 용기를 넣어주시던 그 잔잔한 미소가 깃 든 훌륭한 인품을 소유하셨던 그리운 선생님….
이제는 향촌에서 무엇을 하시면서 부족한 제자들을 떠올리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감하고 계실까? 흔히 하는 서신 한장 못 올리고 전화한통 소홀했으니 과연 후학으로 자질이 있는지 반성해본다. 5월의 싱그러움이여! 백발의 은사님의 건강하시고 행복한 여생을 위해 그 싱그러움을 나눠주소서….

내마음 속에 항상 함께 하는 선생님!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내 마음속에 항상 떠오르는 그 선생님께서는 수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영광지역에서 나고 자란 불혹을 넘기신 분들은 존함만 들어도 대부분 아실 것이라 생각된다. 고향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시다가 광주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던 노일준 교수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담임선생님이셨던 스승님께서는 그 당시 윤리과목을 담당하셨다. 목소리도 우렁차시고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께서는 온화하신 표정 또한 생생하게 내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를 학기초 선생님께서 장학생으로 추천을 해주셨다.
부모님께서 고마움의 표시로 전해준 검정 비닐봉지에 담배 한 보루를 담아 내밀었다. 선생님은 부모님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담배를 못 피우니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며 다시 제 손에 다시 들려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동문모임을 통해 선생님을 가끔 뵐 수 있었다.
한번은 결혼식 날을 정하고 주례를 직장 상사께서 하기로 했는데 결혼식 전날 긴급회의가 있게 돼 주례를 변경해야 할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문득 노일준 선생님이 생각나 염치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렸더니 ‘알았다’ 하시면서 제자의 청을 흔쾌히 들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의 세상에 함께 하지 못하시지만 마음의 세상에서 늘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옛시절로 돌아가 크게 웃고 싶어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과 같은 학교를 배정받지 못했다고 울며불며 중학교 입학을 하던 날이 그립다. 15년이 지난 지금에 그때가 이렇게 그리운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선생님으로서 신입생이었던 다름 아닌 나의 담임 최정화 선생님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란 엄하고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친구같은, 언니같은 존재로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 일요일에도 선생님이 학교에 계시는 날에는 선생님을 보러 학교에 나가 선생님과 단짝친구와 함께 점심도 먹고, 수업준비도 했던 추억이 새삼 떠오른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도 가끔씩 떠올렸었는데, 그렇게 소식이 궁금하던 선생님을 길거리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난 그때 선생님에게 달려가 “선생님 저예요. 저 기억하시죠?”라는 말을 끝내 건네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선생님이 나의 모습을 보면 실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초라한 모습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창피했던 것이다. 지금은 후회가 된다. 그때 나의 행동이….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와 함께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을 찾아 뵙고 그때로 돌아가 크게 한번 웃어 보고 싶다.

세월이 흘러도 영원한 목사님의 가르침
부모님을 생각하고 자녀를 생각하게 되는 5월, 나에게는 잊지 못할 스승님이 계시다. 지난달 인천에 갔을 때 예배를 마치고 처음 보는 성도님들이 “영광에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 딸이냐”고 하시며 풍성한 대접을 해주셨다.
댁으로 자리를 옮겨 그동안 못다한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전히 변함없이 오히려 더 뜨겁게 영적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목사님 내외분을 보면서 중학교때 뵙던 모습과 하나도 변함없어 보이셨다. 그때도 그러셨다.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당장 힘써 도와 주시기 보다는 ‘좀더 고민해 보거라’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왜 그렇게 힘이 되는지 모르겠다. 깊이 다시 생각해 보면 그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영적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고민하면서 좀더 기도하게 됐고 기도하면서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으로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서 문제는 점차적으로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됐다. 또한 제자를 믿어주시는 그 눈빛은 정말 내겐 더 큰 힘이 됐다. 지금도 그 대답이야말로 최고의 답이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돼 온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