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민과 함께 하는 우리 문화유산 재조명2
지역문화 발전방안과 영광역사와 문화유산 검토
2010-07-29 영광21
영광문화원(원장 정영길)이 28일 <지역민과 함께 하는 우리 문화유산 재조명> 군민문화강좌를 개최했다.
이번 강좌는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학과 송 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의 <세계문화와 지역문화축제의 활성화 방안>과 전라남도청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의 <전통문화와 지역문화 관광자원>이라는 주제의 강의가 진행됐다.
지역문화 발전방안과 영광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강연내용을 축약해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가치와 특성살린 지역축제로 승화돼야
송 준 교수 /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학과
현재 전 세계적으로 문화는 사회적, 경제적 중요성을 넘어 각 국의 문화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2001년 11월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문화다양성 선언’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문화는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은 윤리적 의무이자 또한 인간 존엄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문화다양성 선언은 사실 미국 주도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유럽과 제3세계의 대응이라는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문화적 세계화가 각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보할 자국의 전통문화 전승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와 지자체들이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문화의 상호침투성을 활용하는 정책을 통해 대안적 세계화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경제적 세계화나 정치적 세계화와는 달리 문화적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화 논쟁의 가장 민감한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문화의 문제는 바로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별 혹은 지자체별 지역문화 진흥정책은 주로 지역문화와 연계된 관광사업 혹은 축제화 사업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만 해도 무려 1,000개가 넘는 지역축제가 거행됐다.
지자체와 지역민들이 축제를 통해 외부에 지역문화를 소개하고 내부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노력 자체는 좋지만 문제는 비슷한 행사가 너무 많아서 기대만큼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심지어는 유사축제가 너무 많아 지자체나 국가의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한다.
서구모델 중심의 보편화된 문화의 확산은 IT와 인터넷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광속에 가까운 정보전달과 전환의 속도, 무제한적인 정보전달 용량, 시공간의 단축 등은 지역적 변별성을 담보하는 지리적, 사회적 장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서구화된 취향의 대량살포가 가능한 인터넷문화의 발전에 지역문화가 어떻게 대응하고 이를 역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유·무형 문화적 소산 보존 계승해야
김희태 전문위원 / 전라남도청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쓴다. 화재, 유적, 유물, 문화유산, 고적, 명승지, 사적, 사적지, 세계유산….
이러한 말들은 모든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속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의 문화활동의 소산으로서 남겨진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문화재라고 총칭한다. 예술 과학 종교 도덕 법률 경제 민속 생활양식 등 여러분야를 망라한다. 여기에서 ‘문화’의 정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보물 고적 명승이나 유적 유물이란 말들이 쓰였다. 1961년에 문화재관리국 직제가 공포되면서 문화재라는 용어의 사용이 공식화됐으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일반화됐다.
문화재란 한마디로 민족이 이룩한 유·무형의 모든 문화적 소산을 포괄하는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영광지역의 역사배경은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진도와 같이 섬지방의 고을은 내륙으로 옮기기도 한다. 진도는 1350년 현재의 영암 시종으로 옮긴다. 이 와중에서 20여개 고을이 없어지거나 인근 고을에 합해지기도 한다.
백제 이래로 독립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했던 육창, 삼계, 임치현 등도 없어지며 합해지기에 이른다.
조선 개국이후 지방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영광은 1456년(세조2)에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 이래의 읍터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때 향교도 함께 옮긴다. 영광은 조선초기의 개편이래 큰 변동은 없었으나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극규란 사람의 역옥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됐다가 10년이 지나 복구됐다. 군현의 하부조직으로는 면리제가 나타난다. 보통 읍의 치소는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면을 분할한다.
우리는 흔히 ‘홋수는 영광만한 데가 없다’는 말을 쓴다. 한말에 유행된 말이다. 영광은 호남에서 가장 많은 의병지도층을 배출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영광 불갑의 유봉에서 태어난 수은 강 항 선생은 정유재란시에 일본으로 잡혀갔지만 지조를 지키면서 성리학을 전수했고 적국의 사정을 국내에 보고하는 등 애국충정을 다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