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잎이 만날 수 없는 상사화의 운명은 ‘숙명’

제10회 영광불갑산상사화축제 기념 시·수필 인터넷공모전 수상작

2010-10-28     영광21
대상 / 안 미 정 <광주 서구>

줄기에 얹혀있으면서도 도도하게 아닌 척 멋스럽게 날개를 펴고 있는 상사화의 붉은 기운이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저렇게 피를 토한 것 같은 붉은 빛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진녹색 줄기에 대롱 매달린 꽃. 잎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끝까지 줄기에 대롱 붙어보지만, 상사화의 운명은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과학의 힘이라도 빌려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과 다른 시계를 가지고 있는 불갑사. 해가 질 때쯤, 절다운 절이 되었다. 낮엔 기꺼이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저녁때부터 고즈넉해지는 절. 생소한 단어들을 들었다. 공양, 포행, 마라난타.

인도에는 브라만계급, 크샤트리아계급, 바이샤계급, 그리고 노예인 수드라 네 계급이 있었다. 다른 카스트, 즉 다른 계급과는 결혼을 못할 뿐만 아니라 음식도 같이 먹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노예 계급인 수드라는 외양간 같은 곳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들의 몸에 방울을 달아 소리가 나도록 하여 마주치지 않게 했으며, 외출할 때는 발가벗겨서 그들과 옷깃이 스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음식에도 손대지 못하게 했으며, 만일 수드라가 부엌의 음식을 보기만 해도 그 음식을 다 버리도록 했다.

브라만 계급인 마라난타와 수드라계급인 지파사가 만났다. 보석도둑 누명을 쓴 하녀 지파사는 주인의 혹독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쳤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지파사는 걸식을 했고, 사내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지파사를 구해준 것이 마라난타였다.

지파사를 처음 본 마라난타는 지파사가 낯설지 않았다. 수도 없이 꿈에서 본 사람이었다. 하녀에게 지파사를 깨끗이 씻기게 했고, 아픈 것을 치료하게 했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반듯하게 뉘였다. 그러면 또 어느새 몸을 웅크리는 지파사였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지파사를 토닥여주었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얼굴은 새파래지고 퀭한 두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는 지파사였다. 마라난타는 지파사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벌벌 떠는 지파사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고개를 들게 하고 괜찮다. 끄덕여주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소음에 익숙한 내 귀가 호강을 한다. 바닥을 치듯 따닥 소리가 난다. 아니 따글거린다. 마라난타와 지파사가 잘되길 바란다. 책에는 전혀 없는 내용을 난 이렇게 고쳐본다.

지파사의 몸이 완쾌되고, 마라난타의 하녀가 되었다. 입의 혀처럼 영리한 지파사였다.
마라난타의 마음을 잘 읽었다. 피곤하면 베개를 가져다주었고, 갈증이 날 때는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마라난타가 베다를 공부할 때면 부르면 대답할 만한 자리에 있었다. 그냥 자리만 하고 있지 않았다.
주인인 마라난타가 하는 공부를 따라하고 있었다. 그 시대에 수드라계급이 베다를 외면 귀를 멀게 했고, 성전을 읽으면 혀를 잘랐다. 또한 성전을 기억하면 몸을 두 동강 낸다는 규정이 있었다. 마라난타는 지파사가 좋았다.

그즈음, 마라난타의 엄마인 스마나는 차 모임을 자주 열어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명가의 딸들을 초대하여 자연스러운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모임에 참석한 처녀들은 중국의 비단, 로마의 유리, 화려한 보석, 화장하는 법 등에 대하여 떠들 뿐이었다.
지파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훨 재미있었다. 점점 차 모임을 가지 않게 되었다. 지파사와 같이 산책을 가고, 지파사와 같이 밥을 먹고, 베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지파사가 베다를 이야기할 때면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달콤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바람을 타고 지파사의 머리카락이 마라난타의 볼을 스쳤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발그레한 두 볼이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지파사의 눈은 깊고 맑았다.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는 지파사였다. 손으로 받쳐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댔다. 온 몸이 전율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을 모두 얻는 기분이었다. 찰나의 입맞춤이었다. 지파사가 놀라 집 쪽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마라난타는 온종일 지파사 생각을 했다. 지파사가 싫다면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지파사의 모든 움직임이 신경 쓰였고, 지파사의 모든 말이 가슴 설레게 했다. 콩닥이는 심장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나중엔 명치가 아려왔다. 지파사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마라난타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파사가 치러야 할 몫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그 때였다. 어머니 스마나가 혼사를 이야기했다. ‘스나’라는 아가씨였다. 차 모임에서 몇 번 본 아가씨였다. 새치름한 인상이 떠올랐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마라난타였다. 가슴이 불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지파사를 사랑하는 일이 지파사를 죽이는 일이란 것을 수도 없이 되 뇌이며 지파사를 멀리했다. 지파사는 빨래하는 일을 하게 됐다. 조금 떨어져 지파사를 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봐도 못 본 척했다.

지파사의 가슴에도 꽃이 피고 있었다. 마라난타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출 때부터, 아니 그녀를 구해주고 안아주었을 때부터, 아니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자신을 바로 눕혀주었을 때부터였다.

그녀에게 마라난타는 우주였고, 모든 것이었다. 곁에 머물게 하는 축복을 주었을 때는 우주를 품은 것 같았다. 마라난타를 닮고 싶었다.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도, 베다를 공부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보답하고 싶었다. 목숨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마라난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래하는 하녀가 되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가슴은 붉은 피를 토할 지라도 이만하면 천국이었다.

마라난타와 닮아지기 위해 베다를 공부했다. 다른 하녀들이 모두 잠든 다음에 달빛을 빌어 공부했다. 그런 모습을 마라난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슴이 먼저 알아챘다. 마라난타의 숨소리가 느껴지면 가슴부터 뛰는 지파사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