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 같은 성품으로 공직생활 임해
김년수 / 전 영광군청 재무과장
2012-04-19 영광21
한쪽 귀는 안 들리고 다른 쪽 귀는 조금 들린다며 말씀을 자세하게 하시는 부인의 말을 경청하는 김년수(92) 어르신.
전북 무장군에서 태어난 김 옹은 11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고향인 법성으로 와 초등학교를 다니다 졸업할 즈음 모범생으로 우체국에 취직한 뒤 전매청, 교육청을 거쳐 영광군청에 취직했다.
한많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성실함을 인정받았던 김 옹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자유와 혼란이 공존하는 세월을 지켜봤다. 일본을 대신해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거치며 33살에 10살 어린 지금의 부인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옹은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결혼이 늦어 주위에서는 자녀들을 손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난 뒤 군청 사회계장으로 있으면서 미국에서 구호물자가 많이 왔을 때 각 면지역으로 구호물품을 보급하는 일을 맡아 가난과 배고픔으로 피폐해진 주민들의 배를 채워주며 하나씩 하나씩 복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 같은 공직생활 와중에 정직한 공무원으로 뽑혀 지금은 하찮게 여길지 몰라도 당시만 해도 귀하디 귀한 부상으로 받은 시계는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고 있다.
40여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거친 김 옹은 내무과장을 제외하면 주요 보직을 대부분 거치며 지난 1982년 재무과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이 같이 원만한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힘은 부인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 당시만 해도 박봉에 시달리던 대다수 공직자처럼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조용하며 강인한 부인의 내조가 자녀 모두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며 공직생활을 평화롭게 끝마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김 옹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하루 하루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부모님 산소를 자주 다니는 것을 근래 낙으로 삼고 있다. 특히 모두가 장성한 자녀들은 인생의 노년에 하나 둘 찾아오는 병치레속에서도 우리네 모든 부모들의 마음처럼 큰 위안거리가 되고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 양반이 정정했는데 요즘엔 정신이 많이 흐려졌다”며 남편을 대신해 이런 저런 말씀을 해주는 부인은 김 옹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힘이며 벗이 되고 있다. 잠시나마 만난 이들 노 부부의 모습에서 따뜻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새삼 느끼게 한다.
박은희 기자 blesst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