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향교 유생 중심으로 의병활동 전개 영광읍성 사수
각종 자료 145명 규모 의병활동 참가·세곡 보관한 법성조창 수성 역할
■ 호남학 이야기 - 영광 의병사 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원장 김신중) 주관으로 5월2일 영광문화원에서 <향토사가에게 듣는 호남학이야기> 2012년 첫 번째 강좌가 열렸다.
<호남학이야기>는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광주·호남지역 각 문화원과함께 호남학 공동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각 지역의 향토사가를 초빙해 호남학에 관한 다양하고 심도깊은 이야기를 듣는 강좌이다. 이번에 영광에서 열린 <호남학이야기>는 해방이후의 영광, 영광 의병사, 서남면 들노래를 주제로 진행됐다. 본지에서는 지난호까지 연재했던 <영광 서남면 들노래>에 이어 이번호부터 <영광 의병사>를 연재한다.
영광문화원 곽일순 이사가 주제발표한 <영광 의병사>는 크게 임진왜란 당시와 한말 당시의 의병사 등으로 구분됐다. / 편집자 주
<b>영광의 의병활동</b>
영광의 의병활동에 대한 고찰은 임진년(1592년)의 왜란과 한말의 일제강점기 시절 치열했던 항일운동으로 나눠 살펴봐야 한다.
특히 한말의 국제적 영향과 변동으로 인한 일제의 전쟁없는 국권 수탈과는 달리 임진란은 엄청난 전란에 휩싸여 백성들의 목숨과 인권이 유린되는 참혹한 모습이었기에 이에 대항해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각오 또한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말은 나라를 송두리째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임진란은 참혹한 죽음과 시신이 온 나라를 덮었음은 물론 상실돼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백성들은 온몸으로 느껴야 했기에 느낌은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 조정의 당파간 반목과 분열의 틈새를 타고 들어온 왜의 침략에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온 국토가 유린돼 버리는 개국 사상 초유의 사태이다.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팽배해진 자신들의 내부 군력軍力을 국외로 돌리는 방법을 택한 이들이 내세운 조선과의 수교를 전제로 한 억지스러운 정명가도의 발상은 결국 15만 왜군의 말발굽에 조선이 7년여를 유린당하고 만다.
1592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착륙하고 불과 20여일만에 한양이, 70여일만인 6월27일에는 평양마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백성들의 진정한 분노는 바로 왕실과 귀족들의 행위에서 비롯됐다. 백성들은 뒷전이고 우선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궁을 버리고 황급히 도피하는 그들은 이미 나라와 종묘사직을 지키려는 뜻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결국 나라를 지키고자 떨쳐 일어난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백성들이었다.
조선 개국 사상 최악의 군주로 남은 선조는 불타는 경복궁을 뒤로 하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정신없이 도망쳐버렸고 각 지방은 우국충정에 불타는 선비들과 서민들이 봉기해 죽창을 들고 나섰다.
이렇게 이 지역 영광에서도 향교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활동이 시작됐다. 다행히 전라도지방은 이순신 장군의 제해권制海權 장악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따라서 영광지방도 직접적인 왜군의 피해는 면했지만 몇 번의 향교와 오성관筽城館 회동을 통해 단결하고 군량미 등을 모아 전장으로 보냈으며 의병들을 모아 각 의병소로 보내 편입시켜 싸우게 했다.
각종 자료에 나타난 숫자를 규합해 보면 약 145명에 달하는 이들 의병들은 영광군의 수성은 물론 고경명, 송상현, 최경회, 김천일, 심우신, 기효증, 김덕령, 권 율, 이순신, 조 헌 장군 등의 막하에 편입돼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의곡義穀은 법성포로 모집해 해상을 통해 의주 행재소까지 운송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순절자와 순절 열부를 낳았으며 강항 같은 이는 일본으로 포로가 돼 끌려가기도 한다.
한말의 영광군 의병항쟁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속되지만 1907년을 기점으로 격렬하게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고 보면 우리 지역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당시 활동했던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지만 호남지방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시기는 1908년 연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1909년 말의 2~3개월은 최신무기를 보유한 일본군들의 남한대토벌작전이 펼쳐지면서 호남의 의병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만다. 이러한 영광군 의병사를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b>임진왜란과 영광</b>
임진왜란과 연결되는 영광의 대표적 흔적은 바로 임진수성록壬辰守城錄이다. 오성관筽城館의 수성동맹守成同盟으로 잘 알려진 영광군의 의병활동은 실상은 관을 중심으로 이뤄진 의병활동이었다기보다는 향교의 유생들이 중심이 돼 일어났던 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광은 법성포에 위치한 조창漕倉으로 인해 중요한 지역적 특성을 안고 있었지만 왜란이 일어나고 전쟁이 한창인 당시 군수는 상을 당해 관아를 비운 상태였다. 더욱이 28개의 군현郡縣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이 보관됐던 법성 조창의 수성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분연히 일어난 세력이 바로 향교의 유림들이었다. 이들은 일단 읍성사수를 위해 대성전의 위패位牌들을 정리해 안마도로 옮기고 군수를 대신해 수성에 들어간 것이다. 먼저 임진수성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b>영광임진수성록 영광관련 기록</b>
▶ 선조 25년 4월13일 왜선 400여 척이 부산 동래성을 공격
▶ 동년 6월12일 선조 피난행렬이 평북 영변에 도착
- 전 부사 고경명과 전 목사 김천일, 전 부사 박광옥 등은 모병募兵을 하며 북상
- 영광군의 선비들은 향교에 모여서 수성을 논의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식량과 무기를 모아 광주의 의병소로 보냄
▶ 7월12일 광주의 의병들이 금산에서 패하고 의병장 고경명을 비롯 아들 고인후, 종사 안 영, 류팽로 등이 전사
▶ 8월9일에는 전 부사 최경회가 의병을 통솔해 남원으로 진격
- 영광군의 선비 정대수와 김몽해 등이 최경회를 따름
▶ 8월27일 영광군의 선비들은 향교에 모여 수성을 의논하고 군량미를 모을 별유사別有司를 정하고 의곡義穀을 모집
▶ 9월16일 영광군의 의곡 별유사 전 참봉 이굉증과 생원 이용중, 유학 이홍종, 생원 이극부 등이 의곡을 모아 기효증에게 위탁해 수로를 통해 행재소行在所에 전달
▶ 10월2일 영광군수 남궁 견이 상을 당해 해직하고 돌아감
▶ 10월12일 관내의 선비들이 오성관筽城館에 모여 의논
- 충과 의를 다해 목숨을 바쳐 수성할 것을 결의 오성관 수성동맹筽城館 守城同盟 /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