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동학농민운동 당시 영광지역 활동 주요 전적지로 기록

<동학사> 영광군 동학군 병력 8,000명으로 기록·호남에서 남원 다음으로 많은 병력활동

2012-06-22     영광21

■ 호남학 이야기 - 영광 의병사 ④

동학농민운동

한말 일본을 상대로 한 의병의 활동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07년을 정점으로 전국으로 번져 나간다. 계기가 되는 사건을 정미7조약(1907년)으로 고종이 형식적인 권좌에서나마 물러나면서 부터로 보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19세기 말의 격렬한 농민들의 항쟁도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흔히 동학혁명으로 불리는 거대했던 농민들의 반격은 양반지배계급에 대한 단순한 반란이 아닌 보국안민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이었다. 이들의 봉기는 정부의 부패와 가렴주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외국상인들의 침투로 인한 농민들의 어려움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군이 일어난 곳이 이들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봤던 전라도였고 요구사항 또한 탐관오리의 숙청과 ‘일본 상인의 축출’이었다. 일본 상인들에 의한 미곡의 유출과 상권의 침해는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들 동학군의 활동이 의병사와는 약간 방향이 다를 수도 있지만 일본군과의 대접전을 이루었던 전투가 있었던 만큼 조금은 살펴봐야 할 문제다. 특히 영광지역의 동학군 전쟁은 한국현대사 등에 주요 전적지로 기록이 돼 있을 만큼 중요하다. 그 가운데 1차 봉기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추려서 살펴보자.

▶ 1894년 4월12일 동학군이 무장에서 영광으로 진격해 들어옴
▶ 14일 동학군 수만명이 법성포에 머무름. 무기를 들고 한선漢船이 난입하여 사공이나 일본인을 만나면 구타했다고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서울로 전보.
▶ 전운선 한양호가 세곡을 싣기 위해 법성포에 들어오자 전운국원 김용덕과 일본인 나가노 겐지로(항해사), 도꾸나가 아사지로(기관수) 등 5명을 체포해 버림.
▶ 일본 상인들과 내통하여 일본 물건을 비싸게 파는 객주나 여각을 습격하여 응징
▶ 장성 황룡촌에서 크게 패한 초토사 홍계훈은 외병차용안外兵借用案을 건의하여 외국군을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듦.
▶ 외병차용안은 청군을 불러들였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개입을 낳아 청일전쟁을 거쳐 일본군의 본격적인 주권 침해를 불러옴.
▶ 왕실과 귀족들은 대항의 의지를 잃었고, 동학군만이 남북접이 연대하여 처절한 구국항전을 벌이기 시작함(동학군의 2차 봉기)

이렇게 시작된 일본군과의 구국항전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오지영이 지은 <동학사>를 보면 당시 영광군의 동학군 병력은 8,000명이며, 주도 인물은 오하영과 오시영으로 호남에서 영광이 1만여 병력으로 남원 다음가는 병력을 가진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최시철과 오정운 등은 전봉준 위하의 장령급으로 활약했었다고 <동학사>는 기술하고 있다.

2차 봉기로 인한 전투는 영광에 상당한 사상적, 사회적인 파장과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백명의 동학군은 그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게 일본군들이 현 축협 옆의 구 우시장 터에 무더기로 화장을 해서 뼈를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영광의 동학군을 이끌었던 이시영은 동학당에 위장 입당한 법성포 군진소리軍陣小吏였던 이현숙에게 잡혀 관병에게 인도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활동했던 중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갑오년 재봉기하여 구국항일에 나선 영광의 인물 : 오하영, 오시영, 8천 농민군
▶ 효수되거나 살해된 인물(초토사 보고서에 기록된 대로 옮김)
적괴賊魁 - 송문수, 오태숙 등 : 효수 - 최준숙 외 9명(신상 기록없음) 등은 총살
거괴巨魁 : 양경수는 총살, 이현숙은 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