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 영광지부 해방 이틀뒤 결성 발빠른 행보

해방정국 수습하며 치안확보 적산관리 위해·일제시대 사회운동 활동가 다수 참여

2012-08-10     영광21

■ 8·15 광복 이후의 영광 ① - 건준 영광지부의 설립과 조직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원장 김신중) 주관으로 지난 5월 영광문화원에서 <향토사가에게 듣는 호남학이야기> 강좌가 열렸다. <호남학이야기>는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광주·호남지역 각 문화원과 함께 호남학 공동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각 지역의 향토사가를 초빙해 호남학에 관한 다양하고 심도깊은 이야기를 듣는 강좌이다.

영광문화원이 주관한 <호남학이야기>는 8·15 광복이후의 영광, 영광 의병사, 서남면 들노래를 주제로 진행됐다. 본지에서는 서남면 들노래, 영광 의병사에 이어 이번호부터 <8·15 광복 이후의 영광>을 연재한다.
관련 내용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여에 걸쳐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크로스 체크하고 여러 기록물들을 토대로 이뤄진 현장기록이다. 내용의 모든 책임과 권리는 원고의 저작자에 있으며 상업적으로 이용하거나 무단사용으로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은 이용자에게 있고 인용이나 발췌는 저작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 편집자 주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은 일제하에서 민족·사회운동을 하던 지역인사들에게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정치, 행정, 치안 등 권력의 공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본의 전황에 대해 라디오 등을 통해 전해들은 지역인사들은 이념과 정치적 신념, 또는 친분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도층인사들은 8월16일 천주교 등지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8월17일 오전 11시 영광금융조합 2층 회의실에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영광지부 결성식을 가졌다. 해방이라는 상황 하에서는 건준이라는 과도적 조직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를 담당할 인사들은 많은 군민들의 지지를 담보할 수 있는 인사들이어야 했다.

광복후 전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사회단체는 8월15일 오후 1시 전남 도청소속 직원 300여명으로 결성된 ‘전라남도 도청 조선인청년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곧이어 각 지방의 군청에서도 자체적으로 청년단이 조직됐다. 청년단의 임무는 치안이 마비된 당시의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적산관리와 치안유지를 하는 것이었다. 전남 건준은 8월17일 광주에서 결성됐는데 중앙의 지시없이 자발적으로 발족했고 전남의 각 군에서도 해방과 함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건준을 결성했다.

영광건준 해방 이틀뒤 결성
건준 영광지부 결성식에서는 조주현(이하 조운)을 중심으로 정진삼과 정영삼 그리고 허 용, 정 욱 외 100여명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해방 이후의 지역사정 및 다른 지역의 움직임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이들은 건국준비를 위해 매진하기로 하고 해방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치안확보와 적산관리 등을 위해 건준 지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조운의 발의에 따라 위원장에 조희충이 추대됐고 부위원장에 조용남, 총무부장에 조 운, 조직부장에 정태송, 청년부장은 정영삼, 문교부장에 이을호, 치안대장에 정진삼, 재무·회계는 허 용, 적산관리부장에 정 욱 등이 선임됐다.

일제하에서 사회운동·청년운동·노농운동·항일운동 그리고 특히 민족교육을 주도하면서 민예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지역인사들 중에는 소지주, 일본의 대학이나 서울 등지에서 유학했던 사람들 또는 조선공산당조직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부분 일제하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나름대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영광지역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갖는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군민들의 지지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건준 조희충 위원장 해방직후 군수 재임

위원장에 선임된 조희충은 1888년 영광면 출신으로 당시 62세였다. 정인영과는 사돈관계, 즉 치안대장을 맡은 정진삼의 장인이며 나락 300석 정도를 올리는 소지주였다. 그는 광흥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신간회 영광지회 발기준비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3·1운동, 청년회, 중학기성회, 추인회, 재만동포옹호동맹, 수업료징수개선 요구운동 등 일제하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인사록>에 의하면 미군정기인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8일까지 영광군수로 재임했다.

부위원장을 맡은 조용남(일명 조룡)은 1901년생으로 영광면 출신이다. 1923년 영광청년회 이사, 1925년 청년회 집무위원, 여성연맹 고문, 1927년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전남도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공청) 영광조직책임자, 토우회 집행위원, 영광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영광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 영광노농대회 집행위원장, 1928년 신간회 영광지회 발기준비위원, 제4차 조공 전남도당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는 일제하 영광지역에서 진보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일제하 민족운동 참여자 상당수
영광의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조공 전남도당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제 3·4차 조공 때의 일이었다. 1·2차 조공 당시에는 주로 전남 동부의 화요회 계열 인사들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검거됐다. 따라서 3·4차 조공의 전남 조직은 주로 전남 서남부의 서울청년회계열의 인물들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남 조공에 참여한 서울청년회계 인물들은 서울청년회 신파로 분류된다.

1927년 2월 강석봉, 유 혁, 김재명 등이 조공 전남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1928년 1월까지 각 지역별로 당과 공산청년회의 조직이 만들어지는데 영광에서는 조용남이 당과 공청의 책임자로, 김은환이 당 조직원으로 그리고 남궁현이 공청의 조직원으로 참여했다. 조용남은 김재명의 권유(1927년 봄으로 추정)로, 김은환은 1927년 6월 강석봉의 권유로, 남궁현은 1927년 9월 조용남의 권유를 받고 입당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조용남은 조선일보 영광지국 기자, 김은환은 조선일보 지국장, 남궁현은 중외일보 법성포지국 기자였다. 조용남은 제4차 조공 때에는 전남도당의 책임비서가 됐다. 그는 1931년 공청사건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광복후 영광과 광주를 왕래하며 도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라남도연맹 대표,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전남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과 산업부장, 1946년 3월 민전 전남지부 무임소위원으로 선임돼 활동하다가 1946년 고문으로 인한 지병으로 사망했다.

일제경찰 해체않고 흡수해 치안유지
총무부장을 맡은 조 운은 영광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 1900년 영광면 도동리에서 태어나 영광보통학교, 목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지역의 민족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3·1독립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1922년 사립 영광학원 국어교사(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를 넘을 때’ 등 3편의 자유시 발표, 춘원 이광수와 교류), 1925년 청년회 집무위원, 1927년 한글회 창립멤버, 토우회 집행위원, 추인회, 갑술구락부(항일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결성), 청년동맹 집행위원, 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35년 영광체육단에 참여했다가 1937년 구속돼 1938년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그는 1947년 서울로 이주해 같은 해 <조운시조집>을 간행했고 동국대학에서 시조론, 시조사 등을 강의하다가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조직부장을 맡은 정태송은 1909년생으로 영광면 출신이다. 정인영의 둘째아들이며 정진삼의 동생이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했으며 영광에 돌아와 수리조합 서기를 맡기도 했고 백수면에 있던 아베농장 사무관리 책임자이기도 했다.

1935년 소인극회에 참여했으며 건준 해체 이후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빨치산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월북했다고 한다.

치안대장을 맡은 정진삼은 1905년생으로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세무서, 면사무소에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1935년 영광체육단에 참여했다가 옥고(1937년)를 치렀다. 정진삼은 일제 때의 친일경찰을 해체하지 않고 흡수해 치안대를 조직했고 건준은 일제 때 사법주임을 한 박동복을 부서장으로 임명해 정진삼과 함께 활동하도록 했다. 이들은 경찰서를 접수하고 영광치안유지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인민위 해체 이후 지하활동을 하다가 빨치산 토벌작전 때 군경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또는 월북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