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건준 독립국 수립위한 과도기 조직 전민족적 통일체 표방
건준위원 배제인물 기준 일제 면장 도평의원 경찰 관련자 이후 다소 완화
■ 8·15 광복 이후의 영광 ② - 건준 영광지부의 설립과 조직
적산관리부장을 맡은 정 욱은 1909년 백학리 47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9년 광주공립농업학교 독서회사건으로 구속돼 3년6개월의 중형을 받고 1년 복역하던 중 출감해 1935년 소인극회 회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영광체육단에 참여했다가 1937년 목포형무소에 재수감되어 1년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선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성진회, 독서회 등에서 민족해방과 식민지 노예교육반대를 주장하며 동맹시위를 단행하는 등 각종 항일운동의 전위에 서 있었다. 1990년 12월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문교부장을 맡은 이을호는 1910년 영광읍 백학리에서 태어나 영광학원에서 공부하고 중앙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1934년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읍 남천리에서 호연당약방을 경영했으며 1935년 영광체육단에 관여했다가 1937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해방후 영광민립고등중학교(이하 민립중)를 설립하기 위해 자신의 농지를 기부했고 1945년 민립남자고등중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건준 초기 명망가에서 실무자 중심 재편
청년부장을 맡은 정영삼(1915년생)은 일제하에서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광복 당시 영광군청 국민총력계에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구술증언에 의하면 1948년 이후 영광, 염산, 백수, 불갑면 등지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1951년 백수면 대절산 갓봉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고 한다.
건준은 민주주의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준비하는 과도기적 조직체로서 전민족적 통일체임을 표방했다. 건준 영광지부의 조직구성은 당시 도 건준에서 보내온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당시 전남지부의 조직구성을 보면 위원장 최흥종, 부위원장 김시중·강해석, 총무부장 국기열, 치안부장 이덕우, 재무부장 고광표, 선전부장 최인식, 학무부장 신순언, 산업부장 한길상, 조직부장 김범수 등을 비롯한 58명의 건준위원이 선출됐다.
이들의 직업은 목사·지주·기자·의사·변호사 등으로 지방의 명망가들이었다. 이후 건준 내부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갈등을 빚어 결국 진보진영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준은 좌익적 성격이 강한 조직으로 변모했다.
9월3일 도민대회에서 위원장 박준규, 부위원장 강석봉·국기열·김 철, 조직부장 김종선, 산업부장 한길상, 총무부장 장영규, 후생부장 노종갑, 지방부장 조병철, 학무부장 강해석, 치안부장 이덕우, 무임소위원 이익우 등으로 새롭게 임원진이 구성됐다. 이처럼 전남 건준은 명망가 중심에서 실무활동가 중심으로 개편됐다.
해방후 영광 친일파 일본인 보복없어
도 건준에서는 건준위원에서 배제돼야 할 인물로 첫째 일제때 면장경력자, 둘째 도평의원 경력자, 셋째 경찰 관련자 등을 명시했다. 이 시기에 그러한 기준이 존재했는지는 다소 의심스럽지만 영광의 건준 참여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최초의 모임에서 일부 참석자들이 해방된 상황에서 영광군민의 단합을 위해 악질적인 친일인사가 아니면 참여시키자는 반대의견을 개진해 애초의 기준이 다소 완화됐다. 그 결과 해방 전에 군청에서 근무했던 자와 경찰 관련자들이 일부 포함됐다.
영광에서는 타 지역과는 달리 친일파나 떠나지 못한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영광면 백학리 ○○윤의 집에 청년들이 몰려가 불을 지르려고 하자 조 운이 맨발로 달려와 만류하고 보호했다고 한다. 그는 1932년 일제하에서 지방자치제 실시후 초대 도의원에 선출되었으며 학교 평의원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조 운은 당시에 실질적인 영광지역의 지도자였는데 매일 아침마다 위원들을 각 면으로 보낼 때 꼭 훈수를 해 일본사람들을 고이 보내자고 지시했으며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도록 지도하고 계몽했다고 한다.
영광건준 적산 관리·배분 역할
그러나 조 운에 대한 다른 평가와 그에 대한 반감 또한 적지 않다. 그가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했고 건준위원 대다수가 사회주의자였으며 그 중에서도 조 운은 핵심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로 인해 영광청년들이 좌익화됐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좌익조직을 만들어 건준에서 배제된 지역인사들에게 다른 압력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광건준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농장·양조장 등의 적산을 관리·배분했으며 일제하의 한국인 순사를 해체시키지 않고 흡수해 치안을 유지하면서 각 면별 건준위 결성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영광민립중학 설립 등의 활동을 개시했다.
해방전후 영광군 8만1천여명 일본인 906명
1945년 전후 영광군의 인구는 <전라남도 영광군세 일반, 1930>에 의하면 총 8만1,432명으로 한국인 8만484명, 일본인 906명, 중국인 62명이었다. 일제 때와 광복 후부터 6·25전쟁 사이에 몇 번의 증감이 교차됐다.
광복 후에는 전라남도 <도세일람, 1948>에 의하면 영광군의 호수와 인구는 2만3,481호에 14만1,955명으로 징용 등으로 감소했던 인구가 그들의 귀환으로 잠시 늘었다가 1949년에는 13만1,155명으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감소했다가 1955년 12만8,273명, 1957년 12만6,675명, 1969년 16만3,240명으로 증가해 최고점을 기록했다. 1973년에 15만1,088명, 1996년 7만4,349명, 2009년에는 5만7,490명으로 계속 감소했다.
건준에서 관리한 적산 중에서 일제 때 영광군의 유력한 일본인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농장현황은 논문 원본을 참고하기 바란다.
일본인들이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왕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광에 소작제농장을 창업하고 상당수는 수리사업에 뛰어든 동태적 지주라 할 만한 인물들이다.
이 가운데 아베阿部市郞兵衛, 가와사키川崎武之助, 아비루阿比留鑄作 등은 500정보 이상의 거대지주로 영광수리조합의 핵심 창설멤버들이었다. 이외에도 일본인 소유의 많은 가옥과 상가, 여관, 정미소, 음식점, 병의원, 창고 등이 영광면, 법성면, 염산면, 백수면 등지에 분산돼 있었다.
1925, 27년 영광 거주 일본인들의 비율을 살펴보면 일본인은 영광면과 법성면에 540여명이 거주했으며 이는 영광 거주 일본인의 ⅔에 해당했다.
영광건준은 치안과 행정업무를 집행하면서 각 면지역 건준조직의 구성과 일본인들의 재산관리 등의 업무, 교육기관의 정비와 신설 등을 주로 수행했다. 그들은 도 인민위원회에서 배부한 대마지 등을 귀환동포에게 배포해 사용하도록 했으며 3·7제 소작제를 지킬 것을 지시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렇듯 당시에는 영광 건준위의 출범의 행정업무나 경찰기능 등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영광군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성격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국내외 좌우익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주석 이승만(미국에서 귀국하지 않았음), 부주석 여운형(건준위원장), 국무총리 허 헌(건준 부위원장) 등으로 조선인민공화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남·북한 전역에 150여개가 조직된 건준의 지부를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로 개편했다. 이와 병행해 9월14일에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결성되고 11월12일에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인민당이 결성됐다. 그리고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등은 별도로 정당결성을 준비해 9월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중앙의 건준이 미군 진주에 대비해 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하자 지방의 건준도 인민위로 개편됐는데 전남에서도 김종선·유혁·이익우 등이 중심이 되어 9월20일 개편대회를 열었다. 그 조직 구성원을 보면 위원장 박준규, 부위원장 강석봉·국기열·김철, 서기국장 이익우, 조직부장 김종선, 산업부장 한길상, 후생부장 노종갑, 지방부장 조병철, 학무부장 김범수, 치안부장 이덕우 등이었는데 ‘온건보수세력이 대부분 빠진 좌익활동가들의 조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9월12일 서울시 인민위를 시작으로 11월10일 경기도 인민위가 조직됨으로 남한의 7도 12시 131개군에 인민위의 조직이 완료됐다.
커밍스의 조사·분류에 의하면 전남 전역에 빠짐없이 인민위가 조직돼 있었다. 인민위가 행정과 치안을 수행하였던 지역으로는 광주, 화순, 나주, 영암, 영광, 진도, 장흥, 보성, 광양, 완도 등이었는데 이는 전라남도 전체 군의 ⅔에 달한다. 그 밖의 지방은 인민위가 단순 존재한 것으로 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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