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으로 맺어진 관계의 한계

■ <사기史記>의 고사성어로 통찰하는 삶의 지혜 ④ - 인간관계의 명분과 실질

2013-03-28     영광21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는 이해관계가 알파요 오메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인간활동의 양과 질이 이해관계의 틀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사회현상이 심화될수록 이해관계가 인간관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모든 관계를 이해관계 안으로 종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이런 관계가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초래할 것이다. 철두철미 물질만능에 기반한 이해관계가 인간 자신을 병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일찍이 <사기> 곳곳에서 이해에 기반한 잘못된 인간관계를 꼬집는 명언들을 많이 남겼는데 잠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기원전 680년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여공 돌突은 자리에서 쫓겨나서 역이란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여공은 복위를 위해 대부 보하甫瑕를 유인해 협박했다. 이에 보하는 자신을 풀어주면 복위를 돕겠다고 했다. 여공은 보하와 맹서하고 그를 놓아 주었다. 보하는 정자鄭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맞아들여 복위시켰다.

보하는 큰 상과 높은 자리를 기대했으나 여왕은 “네가 군주를 섬기면서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며 그를 죽였다. 보하는 “은혜를 갚기는 커녕 정말 이래도 되는가”라고 항변하며 죽었다. 이에 사마천은 논평에서 잠언을 인용해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권리합자以權利合者, 권리진이교소權利盡而交疏.” “권세와 이익으로 손을 잡은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 하면 서로 멀어지기 마련이다.”<정세가>

바야흐로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서로 미친 듯이 손을 잡는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잡았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바빠질 것이다.

명분을 뒷받침하는 실질
권세와 이익을 마다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권세와 이익이 인간의 모든 것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더욱이 권세와 이익이 다 하면 남는 것이라곤 대개가 추한 싸움뿐이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간절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때다. 권세와 이익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을 흔히 입에 올리지만 정작 ‘명실이 상부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이름(명성)과 실질이 맞아떨어지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최고 통치자 무령왕은 복장을 비롯한 조나라의 풍속

전반을 개혁한 개혁군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기원전 381년 조나라를 제외한 동방의 여섯개 나라중 다섯개, 즉 한·위·초·제·연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왕王이란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나라 무령왕은 여전히 군君이란 호칭을 고집했다. 무령왕은 조나라가 아직 왕을 자칭할 만큼 국력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무령왕은 “무기실無其實, 감처기명야敢處其名也”, 즉 “그만한 실질이 없이 어찌 그만한 명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장자>(소요유)에 보면 “명성(이름 또는 명분)은 실질의 손님이다(명자실지빈야名者實之賓也)”라는 대목이 나온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 노릇을 하던 이름(명성)과 실질이 부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칭찬만 들리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보라’는 말도 나왔는데 사마천은 ‘명성이 실제(실질)를 앞지르는’ 사람들을 두고 ‘명성과실名聲過實’이라 했다.

이 말의 속뜻에는 명성이란 것이 흔히 실제보다 부풀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명성만으로 사람을 쉽사리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져 있다. 사마천은 한나라 초기 반란을 일으켰던 진희란 인물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실제를 따르지 못하는 명성의 허구를 꼬집고 있다.

“진희는 양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자주 위공자 신릉군信陵君을 칭찬하면서 그를 사모했다.
군대를 거느리고 변경을 지킬 때도 빈객을 불러 모으고 몸을 낮추어 선비들을 대접하니 명성이 실제를 앞질렀다. 주창은 이 점을 의심했다. 그래서 보니 결점이 매우 많이 드러났다.


진희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던 차에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받아들여 급기야는 대역무도한 행동에 빠지고 말았다.

아아, 서글프다! 무릇 어떤 계책이 성숙한가 설익었는가 하는 점이 사람의 성패에 이다지도 깊게 작용하는구나!”<한신노관열전>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명성이 실제를 앞지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자들은 마치 양파 같아 벗기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실속없는 화려한 겉모습이나 스펙에 현혹에게 이들에게 너무 많은, 지나친 명성을 우리가 갖다 바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평가해 보자.

세상사 이치는 늘 평범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일쑤 무시하거나 무시당한다. 하지만 세상사 이치를 무시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것은 기본이고 상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사 이치를 거슬러서는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행세할 수 없다.

사악함이 정의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요사스러움이 덕을 이길 수 없는(요불승덕夭不勝德)’(<봉선서>) 것처럼 세상사 이치는 늘 정의와 덕을 추구한다.

김영수 센터장
영광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