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천의 <사기>의 명구를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19 - 판소리와 사기

조선시대 후기와 사기

2013-07-11     영광21

1797년 편찬된 <사기영선>은 정조대왕이 자신이 추구하던 개혁정치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자 <사기>의 인물들을 직접 선정해 엮게 한 것이다.

교정은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에 보게 했다. 정조는 이 영선본을 신하들에게 읽게 했으며 그 자신도 틈만 나면 읽었다.

정조는 계급제도가 뚜렷했던 시절 천대받는 장사꾼들의 전기인 <화식열전>을 이 책에 포함시켜 자신이 백성들의 생활향상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사기>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는 필독서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이 만만치 않았다.
정조대왕이 침체돼 있는 조선의 국운을 부흥시키기 위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으나 기득권 양반 세력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이 때문에 정조가 몹시 아꼈던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과 칩거생활을 면치 못했다.
1800년 집권층 노론세력의 견제로 벼슬을 내놓고 남양주 본가에 물러나 있던 다산에게 정조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열질을 보내면서 <사기>도 딸려 보냈다. 다산은 3년전 자신에게 교정을 보게 하고 펴낸 <사기영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대왕의 <사기영선>
동시에 정조의 개혁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그 해 정조는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산은 18년이란 유배생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기영선>의 편찬은 정조의 개혁의지를 담은 마지막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득신은 <사기> ‘백이열전’을 1억1만3천번 읽었다고 했다. 물론 과장이지만 그가 <사기>를 얼마나 애독하고 열독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고백이다.
김득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들이 <사기>를 열독했다. <사기>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기록인 <사기> 특히 열전은 숨막힐 것 같은 신분제도와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억압당해 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는 그나마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해방 공간과 같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사기>의 영향은 지식인들의 독서생활에만 한정돼 있지 않았다. 양반들의 놀이였던 판소리 마당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판소리 창본(바디)을 보면 판소리 다섯마당 모두에 <사기>의 대목들이 인용돼 있다.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발달한 민속예술의 한 형태이다. 광대 한명이 고수 한명의 장단에 맞춰 일정한 내용을 육성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른다.
영·정조 때 명창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기틀이 잡혔고 민중예술로서 뿐만 아니라 양반층의 유흥으로 널리 유행했다.

조선시대 <사기>의 영향과 판소리
판소리 바디에는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대 역사서와 명사들의 한시가 다량 인용되고 있다. 이는 당시 양반층의 지적 욕구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배치로 보인다. 특히 <사기>는 판소리 다섯마당 곳곳에 배치돼 소리의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사기>의 유명한 장면들이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런 현상은 중국 소설과 희곡에 <사기>의 고사가 큰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흥보가’에도 <사기>의 흔적은 십여군데 이상 발견되는데 그 중 한대목만 소개해 보겠다. 흥보가 2장 제6 ‘양주탄식’ 대목의 일부이다.(창본은 송만갑 - 박봉술 바디 ‘동편제 흥보가 창본’이다. 이 창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운산 송순섭 명창의 창본인데 2007년 운산 송순섭 판소리연구원에서 펴냈다.)

흥보는 처자식 먹일 양식이 없어 놀보에게 곡식을 얻으러 갔다가 형수에게 주걱으로 뺨을 맞고 쫓겨난다. 처량한 몰골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되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자 흥보 마누라는 단번에 거짓말을 알아채고는 이렇게 읊는다.

가기 싫어 허는 것을 몹쓸년의 계집이
굳이 가라고 우기였다 이 지경을 당허였네
옛 글에 이르기를
국난國難에는 사양상思良相이요
가빈家貧에는 사현처思賢妻라
내 얼마나 얌전허면 중헌 가장을 못 먹이고
어린 자식들 벗기겠나
차라리 내가 죽어
이런 꼴 저런 꼴
안 보는 것이 옳지

 


흥보 마누라가 인용하고 옛 글의 ‘국난에는 사양상이요, 가빈에는 사현처’라는 대목이 바로 <사기> 권44 ‘위세가’에 나온다. 원문은 순서가 바뀌어 ‘가빈즉사양처家貧則思良妻, 국난즉사양상國難則思良相’으로 돼 있다.

<사기>가 우리 역사와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 드물지만 민중의 목소리

를 반영하고 대변한다는 판소리 사설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영향이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위상과 함께 <사기>가 그 막강한 역사 문화적 역량을 장착한 채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김영수 센터장 영광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