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진솔한 희로애락 들노래로 표현

영광의 문화예술인 66-들노래 박균찬

2004-11-25     박은정
서마지기 요논빼미 반달같이 떠나가네/ 지가 무슨 반달인고 초승달이 반달이지/ 능청휘청
저벼륵끝에 무정하다 저오르바/ 난도죽어 후승가서 낭군님한번 섬겨볼레/ 물고는어절철
허러놓고 주인양반 어디갔소/ 우리야전부 손에들고 첩호방에 놀러갔소
모야모야 노랑모야 니언제커서 열매열래/ 이달커고 훗달커서 칠팔월에 열매열지/ 능청휘청
저벼륵 끝에 무정하다 저오르바/ 나도죽어 후승가서 낭군님부터 슴기볼래/ 서마지기
요논빼미 반달같이 떠나가네/ 니가무슨 반달인고 초승달이 반달이지/ 이물고저물고
와장창허러놓고 주인네양반 어디로갔소/ 무네야손수건 손에들고 첩호방에 놀러갔소/
모시야적삼 반소반에 분통같은 이젖보소/ 많이나보면 병날터이오 손텁만치만 보고가소.

“격식과 절차 필요없는 구수하고 풋풋한 소리”
예전 여러 농사일을 마을의 공동작업으로 실시하던 시절, 작업의 힘든 고통과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던 노래가 있다. 그 들노래를 구성지고 맛깔스럽게 부르는 박균찬(72)씨.
“18살부터 마을 어른들 어깨너머로 들노래를 배웠다”는 그는 군남면 대덕리 대화마을이
고향이다.

들노래란 들에서 일을 할 때 부른 노래로서 농민들이 고달픈 삶을 위로하고 고된 농사일의 피로를 덜어주는 노동요인 것이다. 옛 어른들은 해마다 풍년의 시작이 바로 모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들노래 대부분이 모심기와 관련된 노래가 많다. 모찌기노래, 모심기노래, 논매기노래, 길꼬내기 등….

물아물아 가야물아 이논빼미 채워다오/ 우리아기 젖줄같은 비온논에 모자란다/ 서마지기 이논빼미 천석만석 부라주소/ 산아산아 가야산아 우리겨리 가야산아/ 산아산아 가야산아 정럭모두 가야산아/ 이들판을 살찌우고 우리논을 보살피소.

“이 노래는 농사의 풍요와 안녕을 기대하는 농민들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지”라며 들노래 한소절을 들려주는 박 씨. 그는 전통민속예술 한마당인 남도문화제 등 전국민속문화경연대회를 1979년부터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출전하며 25년 가까운 세월동안 선소리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 씨는 지난달 28일부터 29일까지 3일동안 구례에서 열린 남도문화제에 <동삼면들노래>로 국악협회회원 63명과 출전해 버금상을 수상했다. 그는 현재 영광국악협회 회원
으로 소속돼 있다.

“우리 영광팀들은 전국대회에도 여러번 참가해 많은 상을 받았었다”며 회원들의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얼마전 MBC TV방송 ‘얼씨구학당’에 출연해 들노래를 불러 다른 시·군의 참가자를 제치고 장원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영광국악협회 한의천 회장은 “들노래는 우리민족이 이 땅에 삶을 영위할때부터 읊조리던 음악으로 문학인 동시에 하나의 종합예술이다”며 “박 씨는 초성(목청)이 좋은 선소리꾼으로 먼저 길고 구성진 가락을 뽑으면 여러 사람이 제창으로 후렴구를 받아넘기는 들노래를 아주 잘 부른다”고 그의 실력를 평가했다.

들노래와 같은 서민적인 민요는 민중의 삶속에 자생하며 주어진 공간적인 조건속에서 인간다운 삶,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좌절과 체념 그리고 희망이 투명하게 그대로 배어있다. 삶 그 자체이며 인생의 진솔한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농요를 평생 불러온 박 씨.

그는 실제 농사를 지으며 주민들과 노동의 피로를 잊고 풍작을 기원하는 깊은 뜻과 의미를 담아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요즘은 기계의 발달로 전통을 보존하고 그 맥을 이어 후손에게 알리는 유일한 전통문화보유자로 소중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현대문명에 밀려 들노래 같은 중요 문화유산이 차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아 인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십명이 꽹과리 장구 북 징 등 풍물을 치며 일렬로 서서 모를 심고, 북잡이가 중모리장단을 치는 가운데 선소리꾼의 선창을 따라하며 일꾼들이 모심기소리를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박 씨와 같은 소리꾼을 통해 다시 그때 그시절의 모습을 재현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와 의미는 무척 큰 것이다.“민요는 특별한 재주나 기교 없이도 누구나 만들고 부를 수 있지”라며 웃는 표정에도 흥겨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박 씨.

그는 즐기는데 특별한 격식이나 절차가 필요하지 않고 옷깃을 여미고 감상해야 하는 선비들의 음악과는 다른 구수하고 풋풋한 소리 ‘들노래’를 지역민과 함께 오랫동안 즐기고 싶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