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한일 문화전도사, 수은 강 항
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⑤
강 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질문에 응해 조선의 과거제도와 춘추 석전의례를 설명해줬다. 후지와라는 강 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경서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강 항과 조선 선비들이 쓴 경서는 주자의 주석에 따라 훈점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편찬 작업의 일부였다.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하면서 강 항이 큰 역할을 한 이 책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 텍스트였다.
“안타까워라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했음이여! 또 왜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에서, 그것도 바로 이런 때 태어났을까요. 내가 1591년 신묘년 3월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려했더니 병에 걸려 돌아와야 했고 병이 좀 나으면 조선으로 가려했더니 연이어 전쟁이 벌어져 나같은 사람을 받아줄까 싶어 감히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귀국(조선)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운명인가 봅니다.”
일본에서 성리학 후학 양성한 강 항
<간양록>에 기록된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 항에게 한 말이다. 이로 유추하면 후지와라는 왜승이지만 유학에 관심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1590년경 교토 다이도쿠지에서 조선통신사와 교류하면서 정주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강 항과의 교류를 통해 비로소 성리학이자 유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강 항은 일본에 억류당해 있던 시절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근사속록> 등 16종의 경서와 성리학 텍스트를 실은 <강항휘초>를 남겼으며 이는 오늘날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돼 있다.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며 은거하던 강 항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후지와라는 강 항과 교류하면서 은전을 줘 생활비와 장차 돌아갈 때 쓸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줬다. 아카마쓰는 강 항에게 증명서를 얻어주며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줬고 후지와라는 사공 한 사람을 더 붙여줘 대마도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다. 일본 승려 게이안도 오즈성주 사도에게 강 항을 풀어줄 것을 적극 권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누구인가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는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 초기의 성리학자이다. 이름은 슈쿠, 자는 렌부다. 가명인 레이제이 대신 중국식으로 본성인 후지와라와 그것을 줄인 글자인 토우를 공식 이름에 사용했다. 승려로 있을 때에는 순수좌라고 불렸다.
그는 일찍이 교토로 가서 상국사에 들어가 선승이 돼 주자학을 공부했다. 유학을 배우러 사쓰마국에서 명에 건너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조선의 유학자 강 항과 교류를 통해 그때까지 교토의 산승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해 경학파로서 확립한다. 주자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을 수용하는 등 포용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근세 일본유학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수은 선생은 불운의 천재로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 조선유학을 일본에 전함으로 우리나라 백제시대 왕인 박사 이후 가장 위대한 한일간 문화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정유재란에 포로의 몸으로 일본유학의 개조로 불리는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사서오경과 정몽 등 성리서는 물론 석전제의, 조선의 과거제도 등 조선유학을 전해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400여년이 지났지만 현지 주민들이 오즈시에 ‘홍유강항현창비’를 세웠고 일본의 내각문고에는 수은 강 항 선생이 외워서 필사한 경서 등 16종 21책이 <강항휘초>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내 일부 인사들이 기왕에 발간된 수은 선생의 문집중 일부 내용을 오해해 수은 선생이 일본에 퇴계의 학문을 전수했다고 잘못 인식하거나 <간양록>을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10만여 포로들 가운데 혹 생환해 남긴 다른 글과 동격으로 폄하하는 사례가 있음은 후학의 산사람으로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강 항 선생 업적 되새겨야 한다
우리 후생들이 깊이 자각해 수은 선생을 현창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 방안으로는 첫째 수은집 원집을 비롯한 속집 별집 등 문헌을 정리해 새롭게 국역을 추진 보급하고 둘째 내산서원에 소장된 도서과 국립중앙도서관과 이화여대, 전남대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들도 보다 쉽게 독자들이 보고 읽을 수 있는 방안, 예를 들어 내산서원 또는 영광문화원에 수은 도서관을 마련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셋째 연구모임, 사적 전시관 등을 조성하고 답사체험 등을 전라남도와 영광군 지방자치단체, 학계, 진주강씨 종친회, 시민사회단체 등이 힘을 합해 추진한 후 그 동력을 바탕으로 왕인 박사와 수은 선생에 대한 한일간 민간차원의 연구와 문화교류를 확대해 장보고 시대처럼 우리 호남이 새로운 해양문화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현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산을 우리 스스로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정신을 되살려 후손들에게 자존의 긍지를 지니고 번영을 누리도록 기성세대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맹자께서 말한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은 반드시 집안에서 훼손한 다음에 남이 훼손한다”는 말을 우리들이 깊이 새기고 행동하길 소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