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우도농악은 무령리농악과 신청농악 합친 것”
■ 신청의 역사성에 입각해 바라본 전경환의 예술세계 ②
“영광우도농악은 무령리농악과 신청농악을 합친 것이다”
무령리농악은 마을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풍물굿이다. 신청농악은 영광신청의 무부들이 중심이 돼서 쳤던 농악을 기반으로 한 굿이다. 이 두가지 굿은 영광읍내에서 매년 벌어지던 마당밟기에서 경쟁적으로 겨루던 두패이기도 하다. 마을을 기반으로 한 굿은 기량에서 신청농악과 대적하기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신청농악은 일반적으로 기량이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굿이며 신청농악에 기반을 둔 무부들이 불세출의 명인으로 그 명성을 지금까지 빛내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처럼 상반된 두 굿을 하나로 엮어낸 굿이 전경환패가 갖고 있었던 우도농악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광우도농악이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를 결합시켜낸 주체가 집단이 아니라 개인 전경환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영광이라는 명칭이 과연 타당한가. 전경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하집이라는 상쇠를 들먹이기 일쑤였다. 10대 후반에 최하집을 찾아가 한동안 굿을 배웠노라고 자랑(?)했다. 그분은 군법의 대가였음을 특히 강조했다. 또한 최하집과 굿을 치던 어른들로부터 다음의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1, 2, 3채나 알고 굿을 치느냐”
군법을 강조하고 굿이 이뤄지는 원리와 그 근원에 바탕을 둔 굿인가를 요구하는 옛 굿쟁이들을 애써 강조하면서 소개하고 그곳에다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시키고자 한 전경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그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면에는 자신이 이를 표방하고 있으며 이를 구현하는 전형적인 사례이자 정통성임을 강조하려는 속뜻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전경환이 이를 얼마나 강조했으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방증해주는 사례가 있다. 전경환의 굿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평가받아도 무리가 없는 광산농악의 정득채 상쇠가 한동안 최하집의 행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 고민과 노력을 필자에게 간간히 털어놓기도 했다. 분명 전경환은 최하집의 군법에다 자신의 농악을 잇대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것이 일부라고 해도 말이다.
전경환 우도농악의 정체성은?
그런데 최하집은 영광사람이 아니다. 전경환은 우리에게 그를 장성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또 강조했던 사실이 있다. ‘영무장농악’이라는 실체와 역사에 대한 것이다. 영광, 무장, 장성에서 치던 풍물굿을 영무장농악이라고 했다. 이는 전경환이 만들어낸 말이나 개념이 아니고 이전부터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무장농악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실체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풍물굿에 한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문화권임을 부정하기 힘들어진다. 영무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면 이 세 고을의 풍물굿들은 분명한 동질성이나 서로 공유될 수 있는 뿌리가 있었을 것이다.
최하집의 군법은 이에 기반을 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전경환의 굿은 영무장농악과 상통하는 군법을 기저에 두고 영광지역에서 쳤던 대표적인 두가지 성격의 굿을 조화시켜낸 굿이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논점이 있다. 영무장농악은 우도농악이었는가? 굳이 영무장농악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봐서 그 북쪽에 위치한 정읍·김제권의 굿하고 다른 변별력은 무엇이었는가? 또 있다. 영광우도농악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영무장을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논쟁과 의문을 제기되는 문제의 근원과 출발은 바로 전경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전경환이 만들어낸 굿을 갖고 벌어져야하는 고민이자 문제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할 것 같으면 우도농악은 전경환우도농악이래야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고 논쟁이 마무리될 수도 없다. 과연 우도농악인가에 대한 논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농악이라는 용어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우도라는 말이 타당한가는 풀어야 할 숙제다. 전경환영무장농악이나 전경환신청농악이라는 명칭이 저마다의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다. 굿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면서 가려져야 할 숙제이다.
특히 전경환과 그 세대가 다 작고한 지금 그 제자들과 보존회 회원들은 신청농악으로서의 정체성과 그 정통성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과연 타당한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청농악으로서의 내용과 그 가치를 발현시켜낼 수 있는 인식력과 재주를 갖춰야만 타당해질 것이다.
/ 다음호 계속
▶ 박흥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