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절에 대한 회환이 담긴 전경환의 예술

■ 신청의 역사성에 입각해 바라본 전경환의 예술세계 ③

2014-12-12     영광21

전경환의 창작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잡색놀음에 대한 것이다. 우도농악의 잡색놀이인가 전경환의 창작물인가의 여부가 가려져야 할 숙제로 잠재돼 있다는 점이다.
우도농악의 잡색놀이가 대중에게 놀아진 것은 1990년대 후반에 접어 들어선 다음이다. 문화재 지정은 1987년이기 때문에 그 잡색놀음은 심사대상에 있지 않았다. 탈의 존재와 그 나무탈을 쓰고 노는 그야말로 잡색들과 그들의 즉흥적인 재담이 존재했을 뿐이다. 필자가 나름대로 완결구조를 갖는 한판 잡색놀음에 대한 이야기는 전경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다.”
그 말은 옛날 기억도 되살리고 주위에서 수집하기도 하고 무령리마을에서 사용했던 탈을 복원해 제작하기도 하면서 준비중이라는 뜻이었다. 특히 재담과 전체 구성에 대한 고민이 크다는 점을 실토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드디어 결과물이 세상에 드러났다. 물론 재담을 짜고 연출하며 주도한 사람은 전경환이었다.

그의 창작물은 전경환 개인의 더늠이었다. 더늠이란 어떤 명창이 특별히 뛰어나게 잘 부르는 대목을 말한다. 전경환은 학습을 치열하게 한 사람이다. 그렇게 배운 재주를 판에서 최대한 발휘한 사례에 해당한다.
대중을 움직여 궁극에는 돈이 많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데 큰 목표의식을 갖고 있었던 기술이었다. 대중의 감식력은 화려함과 가벼움을 더 선호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의 재주와 가락맛은 그에 순응한 측면이 크다. 결국 그의 굿과 예술세계는 창작을 자유자재로, 거리낌없이 구현한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그의 창작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잡탕으로 폄하하기도 힘들고 그저 이것저것 재료를 모아 적당히 버무려놓은 것으로 평가하기도 힘들다. 전통성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나름대로 완결성을 갖고 있는 내용과 이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탄해진 완결성을 갖는, 그럴듯한 작품을 내놓은 주체는 전경환이고, 그 전경환의 입맛에 맞게 적절하게 간을 맞춰 요리해낸 그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전경환은 왜 우도농악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그런데 그 입맛이 전경환의 입맛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맞을 뿐만 아니라 맛이라는 본질적인 근원에도 상통하는 그런 맛이자 간이라는 점이다. 전경환은 이것을 분명하게 찾아냈고 자신의 재주로 실현시켜냈으며 그에 맞춘 창작물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색깔도 잘 드러내는 그런 창작물이었다. 이 점이 전경환의 위대함이다. 단순한 개인 창작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전경환의 창작기조와 미학은 다음 한마디로 집약시킬 수 있다.

“굿은 수시변통이여.”
이미 앞에서 우리가 들은 이야기다. 수시변통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절대 불변인 그것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새롭게 만나는 상황에 자신의 모습만 바꿔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외형이 변화된 불변의 실체를 지금 이 글에서는 창작물이라고 표현해 왔다. 전경환은 풍물굿의 경우 그 불변의 실체를 최하집의 군법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장단이나 굿에 있어서는 간에다 두고 있다. 정자는 이를 도道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이런 창작감각에서는 그것이 우도농악이든, 신청농악이든, 영무장농악이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상황에 맞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적절하게 포장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하게 되는 목적을 잘 이뤄내면 만사오케인 것이다. 목을 매면서까지 핏대를 올릴 만큼 본질적인 논점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환도 분명 자신이 붙이고 싶은 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애시당초부터 주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뜻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굳이 내세우며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 태도와 생존방식을 전경환은 취해왔다.

그저 자신을 살짝 낮추거나 멍청하게 보여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 대상이나 상황으로 견적을 내렸을 가능성만 더 높아 보인다. 그저 상대의 수준에 맞게 잘 놀려주고 놀아주면 된다. 문화재만 내 손에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도농악이라는 명칭은 전경환의 수 싸움과 기획력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재 이런 논의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의 놀림에 여전히 놀아나고 있을 수도 있다.
전경환은 간간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다. 과거 여인들과의 회환을 드러낼 때 저 깊은 곳에서 무겁게 고개를 드는 그의 한숨소리에서였다. 또 하나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하는 경우였다.

주경야독허고, 놈헌테 하세도 듣고, 아이고 징헌놈의 세상! 싸가지 없는 새끼덜 욕까지 나오게… 기연이 소물 허다가도 쫓아나가고 가매 짜다가도 나가고. 굿소리만 나면 나갔으니께. 아버지헌티 맞더라도 굿소리만 나먼 나가. 촌굿들이 오죽한가. 그저 또당또당허고 막걸리타령이여 막걸리타령

어렸을 적 이유없이 굿을 쫓아 나서게 되는 정황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회환이 두서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 회환의 기저는 바로 경제적 궁핍과 신분적 괄세에 대한 분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신분적 굴레로 인해 ‘징헌놈의 세상’ 대목에 이르면 감정의 앙금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위의 인용도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갑자기 “싸가지 없는 새끼덜 욕까지 나오게…”라는 말이 왜 튀어나올까.
전경환의 피가 단골네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아야 맥락이 자연스러워진다. 이런 이야기를 간간이, 아주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법성포에서 혼건지기굿을 끝내고 한담을 나두던 이야기 와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한마디.
“씨벌놈들, 잘난 것도 없는 것들이.”
어린시절 신분적인 것과 연관된 화제를 나누던 상황에서였다. 특징적인 것은 나이 70에 접어들어서도 가시지 않은 그 감정을 드러낼 때는 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는 점이다. 이는 전경환의 삶과 예술세계를 결정짓는 주요한 토양이었을 수 있다는 방증이다.
여하튼 만약 그렇다면 ‘사이비 원형론’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 돼 버린다.
 / 다음호 계속
▶ 박흥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