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 항, 고달픈 억류생활에도 나라 위해 힘쓰다

■ 길위의 인문학 <인문학, 삶을 아름답게 채우다> ②

2015-12-11     영광21

영광공공도서관(관장 김순희)이 지난 9월5 ~ 10월31일까지 지역주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길 위의 인문학 <인문학, 삶을 아름답게 채우다>를 총 7회 운영했다.
본지는 길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중 전남대학교 김동수 교수가 <상사화 피던 날, 수은 강 항과 마주하다>를 주제로 진행한 강의와 불갑면 일대를 탐방한 내용을 요약·정리해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수은 강 항(1567~1618)은 영광 출신의 문신으로 정유재란(1597년) 때 영광 앞바다에서 일본군에 일가족들과 함께 사로잡혀 일본에 끌려가 억류생활을 하다 4년만인 1600년에 귀국했다. 일본에서의 억류생활 중 성리학에 관심이 많은 승려출신의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성리학의 내용을 전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된 사실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의 여러 정세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해 국익에 도움을 주고자 <간양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글은 강 항의 여러 면모들 중 그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려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활동 - 일본관련 정보 수집과 보고
수은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신유학을 전수해 일본유학을 크게 발전시킨 공로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만 이와 아울러 일본의 정세나 사정 등의 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정리해 이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애썼던 사실도 주목받아 마땅할 것으로 여긴다.
수은의 이같은 정보수집과 이의 전달 노력은 <간양록>에 잘 드러나 있다.
<간양록>은 적중봉소, 적중문견록, 고부인격, 예승정원계사 그리고 섭란사적 등 모두 5편의 글로 이뤄져 있다.

이들 중 <적중봉소>와 <적중문견록>이 바로 수은의 정보탐색과 수집의 내용을 잘 드러내 주는 편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다른 3편의 글에서도 일본 사정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으나 이 2편의 글은 정보 탐색의 결과로서 작성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적중봉소>와 <적중문견록>에서 수은이 수집하고 본국에 알리고자 했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적중봉소> 중 왜국8도 66주도의 내용은 최초의 일본 도읍, 천황의 권위, 일본의 문자와 언문, 전쟁에 참여한 일본의 지역, 전쟁에 참여한 장수 및 군사수표, 일본의 군사제도 설명 및 이점, 대마도의 술수, 일본 성읍의 장점 및 성읍 계책, 일본의 승무崇武 습속, 조선침략의 원인, 두 왜장의 불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적중문견록> 중 왜국백관도의 내용은 제왕 천자설명, 관직이름 등이고 왜국8도 66주도에는 각 주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다. 또 임진정유 입구入寇 제왜장수는 장수별 설명, 풍신수길 관련, 수길사후 일본 정세 등이 수록돼 있다.
이같은 내용 외에 수은이 일본에서 느낀 점, 우리나라의 군사제도와 외침대비책이라든지 군사훈련, 관리등용책, 군량대책, 현지에서 떠도는 이야기 등(예 : 키요마사淸正 귀신 숭배)도 담고 있으며 본인의 이야기 외에 왜승 순수좌와 도도 다카도라와의 교유, 귀국과정 등의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수은의 정보원은 여러 곳에서 끌려온 포로들, 일본에서 접하거나 교유한 다양한 신분과 직책의 사람들이었다. 다음의 내용에서 이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킷산金山 슛세키지出石寺의 중 호인好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달랐습니다. 신에게 그 나라의 재판 판결문을 보여주었는데 방여方輿와 직관職官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기에 곧 이를 베껴 썼습니다. 또 좌도佐渡: 藤堂高虎의 아비가 매우 상세한 그 나라의 여도輿圖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통역을 시켜 이를 모사해 내었습니다.’- <간양록, 적중봉소 중>
또한 수은은 정보의 수집과 기록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이들 정보들을 어떻게든 빨리 조선 정부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어떤 연구자는 그의 이런 태도를 ‘보고지향적 목적의식을 지녔다’고 언급하고 있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간양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왜국팔도 이하로부터 여기까지는 바로 이예주에서 기록한 것으로 무술년에 김석복을 통해 부친 것이다.’
‘적괴 수길 이하로부터 여기까지는 전에 김석복에게 봉해서 부친 것까지 합쳐 복견성에 있을 때에 기록한 것인데 기해년에 왕건공에게 봉해 부쳐서 전달한 것이다.’
‘…마침 중국의 차관이 가므로 손수 문건 2건을 만들어 하나는 중국 차관편에 부치고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인 신정남 등의 편에 부쳤습니다. 이것은 혹 도중에 부침浮沈 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간양록, 적중봉소 중>
앞에서 보듯이 적지에 억류돼 고단한 삶을 사는 처지에서도 보고 듣고 입수한 여러 정보나 문건들을 글로 쓰고 이를 조정에 보내고자 매우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수은이 이처럼 적지에서 고달픈 억류생활을 하는 중에도 현지의 여러 정세나 국정제도와 운영, 도로 지세와 지도 등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빠짐없이 수집하고 또 이를 우리 조정에 보내 알리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역력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본래 관인 신분이어서 관인으로서의 사명감을 항상 자각하고 있으면서 적지의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가 당시 왜경이라 부르던 후시미성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과 도도 다카도라나 아카마쓰 히로미치 같은 성주급 인사, 후지와라세이카나 쾌경 같은 승려 지식인 등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지녔던 것 등에서 질 좋은 정보의 수집과 이의 정리, 전송 등이 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