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 보내는 고향편지

2016-02-04     영광21

 

“통일되면 한번은 찾아가보고 싶어”

한 윤 호 함경남도 출신(염산면)

8살 어린나이에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맨몸으로 임진강을 건너 탈북한 한윤호(80) 어르신.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이 고향인 한 어르신은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그 다음해에 북한을 떠나 서울로 왔다.
“북한에서 아버지가 공장에 다녔는데 워낙 먹고 살기도 힘들고 그래서 아버지께서 탈북을 결심하셨던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임진강을 건너면서도 애들이 울면 그대로 물에 넣어버리고 했어. 소리가 나면 들키니까. 그래서 죽는 아이들도 많았었어”라고 얘기한다.
1946년 다섯 식구는 목숨을 걸고 임진강을 건너와 낯선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4년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은 또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한 어르신은 “전쟁이 시작되고 무작정 아래로 아래로 걷다가 전북 익산으로 갔어. 거기에서 아버지가 염전일을 하다가 영광에서 와서 정착하고 염전을 만드셨지”라고 얘기한다.
현재 염산면 옥실리 신흥마을은 예부터 실향민촌으로 한 어르신과 같은 상황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한 어르신의 아버지는 염산면에 정착한 후 마을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야월염전, 두우염전 등을 손수 만들어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장으로서 온갖 고생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한 어르신의 아버지는 47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후 한 어르신의 가족은 조금씩 삶의 안정을 찾아갔지만 북한에 두고온 할머니와 둘째동생 생각에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다.
“북에 있는 내동생은 올해 78세가 됐어.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보고싶다고 했는데 못보고 돌아가셨어”라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었는데 한번도 안됐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한 어르신은 거절했다.
“지금은 꼭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해. 그저 북한에 남아있는 동생이 잘 살고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야”라고 얘기한다.
은혜정 기자 ehj5033@yg21.co.kr

 

“언젠가는 할아버지·아버지 뵈러 가야지”

이 근 범 황해도 출신(염산면)

“7살에 북한을 떠나왔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해. 이제는 여기가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
좋았던 추억보다 힘들었던 기억만 가득한 고향을 떠나온 지 어느새 70년. 염산면 옥실리에 살고 있는 이근범(77) 어르신은 이제는 고향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난 이근범 어르신은 7살 되던 해에 할머니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왔다.
북한의 창연도라는 섬에 정착했던 이근범 어르신과 가족들은 남한군인들의 도움으로 큰 배를 타고 목포로 왔다.
“수많은 사람들에 뒤섞여서 목포로 왔는데 학교 체육관 같은 곳에 모아놓고 지역을 나눠주더라고. 우리가족은 맨 마지막에 배분이 돼서 그때 영광으로 오게 된거야”라고 말한다.
영광으로 오게된 이근범 어르신 가족들은 염산면에 정착한 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염전을 만들었다.
이근범 어르신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먹고 싶은 대로 다먹고 여기에서의 삶은 그곳과 비교할 수 없지”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왔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라고 얘기한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는데 북한은 농사를 지어서 나온 수확물을 모두 다 가져다 바쳐야 했어. 지금으로 따지면 군청에 가져다 주는거야. 우리몫은 없었어”라고 말한다.
이근범 어르신의 아버지는 애써 지은 농산물을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비행기 폭격을 맞아 세상을 떠나게 됐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향을 떠나게 돼 함께 오지 못한 것이다.
실향민촌인 염산면 옥실리 신흥마을에도 이제는 3가구밖에 없지만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자주 모임을 가지고 있다.
이근범 어르신은 “지금 고향에 가라고 하면 어디가 어딘지 모를 것 같아. 워낙 어려서 기억이 안나”라며 “통일이 되면 할아버지 산소도 가고 아버지 산소도 가봐야지”라고 말한다.
은혜정 기자 ehj5033@yg21.co.kr


“고향을 찾지 못해도 잊지는 않을 겁니다”

한빛원전실향민망향회

1979년, 홍농읍 성산리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7개의 마을이 있었다.
안마, 새터, 갓골, 통샘, 우포, 계동, 불동.
파란 해안에 고기잡이배가 떠있고 그 위에서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밝게 웃으며 손 흔들던 아버지. 아이들은 힘껏 모래위를 달리며 떠나는 배를 향해 경쟁이라도 하듯 손을 흔든다. 멀찌감치 서 있던 어머니는 아이들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웃는다.
평화롭고 풍족했던 성산리 주민들은 추억이 깃든 바닷가, 땀 흘려 일했던 논과 밭, 온 가족의 따스한 보금자리까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모두 내어줬다.
3,0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은 다시는 볼 수 없는 고향을 가슴에 품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향을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신 어르신도 많았고 병을 얻어 돌아가신 어르신도 많았다. 무엇보다 당시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아픔마저 잊혀질 훗날이 있어 실향민들의 마음은 더욱 무겁다.
볼 수 없기에 쉽게 잊히지는 않을까, 고향땅에서 잠드신 조상님들이 노하시지는 않을까. 한빛원자력발전소실향민망향회(회장 주병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주병규 회장은 “매년 추석이면 망향제와 주민한마당 노래자랑을 열어 당시 마을 출신뿐 아니라 모든 주민들과 함께 사라진 고향에 대해 추억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잊지 않도록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열악한 재정여건에 지난해에는 치르지 못했다며 침통한 표정을 보이는 회원들이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발인하는 날까지 일손을 놓고 고인을 애도했던 따뜻한 마을, 아이들은 밥 먹을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놀던 평화롭던 마을, 이제 그런 마을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 추억들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망향회 회원들이다.
설 명절에도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망향회 회원들. 하지만 둘러앉아 아름다웠던 마을을 회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 가슴 가슴에 고향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배영선 기자 ygbys@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