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문화 모르면 정체성 알 수 없다”
영광역사문화사료 더 늦기전 기록으로 남겨야… 연재물 책자로 간행 계획
2005-02-11 영광21
본보에 줄곧 연재된 사료는 후일에 책자로도 간행된다. 필자가 34년동안 영광문화원장(부설 영광향토사연구소장)의 경륜에서 얻어낸 향토사료 조사자로서, 국사 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까지 활동한 자이기에 또한 현재까지는 살아있는 영광역사문화사료 보유자라는데서 본사가 집필자로 선정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필자도 생명의 수명이 있을 때 이를 기록으로 남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지만 각종 지역문화사업 추진활동에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를 추진 못해 왔던 것을 오늘에야 본사와 공동으로 추진하게 된 것을 늦게나마 자책의 반성도 하게 됐다.
필자가 앞으로 줄곧 본사의 지면을 통해서 영광의 근현대사 조명을 연재키로 한 것은 고희가 넘어 짧은 여생의 필자에게 더더욱 바쁜 몸으로 임하게 해 주었다. 이의 사명감이 막중하다는 것을 필자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십여년 후일에도 오명을 남기지 않은 영광의 역사(향사) 문화 집필자로 평가받는데 연재 집필할 때마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올바르게 임할 것이다. 필자가 34년동안 향토사를 발굴, 수집 조사연구 정리해 둔 기록과 필자가 직접 듣고 보고 뇌리에 담아 두었던 모든 것을 이 지역에 털어 놓을 시기가 왔기에 말이다.
필자는 이 사업추진에 앞서 호남신문사 사장과 전국문화원연합회 회장으로 모셨던 민족시인 노상 이은상 선생님께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는 그 지역 정체성을 논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지역이 세계적이란 것도 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생각나서 만시지탄이지만 뒤늦게나마 현세대들이 살아 있을 때 우리고장의 100년 전후의 역사와 문화를 가꾸지(수집된 자료정리 편찬간행) 않으면 영영 시기를 놓치고 말아 적어도 30년에서 100년후엔 후세대들이 평가하고 여기에서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후세대들도 선대들이 해온 향토사를 토대로 해서 이어서 향토사를 써 갈 것이다.
필자는 본보지령 제111호(2005년 1월6일자)의 2면 포커스편에 '수천만원 투입된『영광군지』무용지물 -영광군, 4년만에 다시 만든 재개정판도 오류투성이 -2002년 재개정판 작업졸속 추진, 전형적 예산낭비'라는 제목으로 비판기사가 크게 게재된 것을 읽어 보고 필자를 포함해서 영광군과 영광군민들은 한마디로 투철한 역사와 문화의식이 없는데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싶다.
이의 비판기사가 12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판기사가 보도되었다는 것만도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영광의 역사(향사) 문화사료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록으로 남게 됐다는 사실(史實)을 우리 모두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필자는 지난 1983년 8월15일 발행한 <옥당골 전통문화>지(391쪽, 발행처 : 영광군, 인쇄 : 광주일보 출판국)를 내고장 전통가꾸기 영광군 편찬위원회 상임집필 겸 편집위원으로 위촉받아 이에 참여했을 때도 「3·1운동과 영광」사료 등의 집필자(당시 서단 새마을금고연합회, 영광군지부협의회장 : 상임집필 겸 편집위원)도 문제제기로 전남도 경찰국 대공과에서 곤욕을 치룬 사건도 있었지만 그 외의 목차에 기록된 사료는 편찬위원 17명중 5명의 고문과 6명의 위원들로부터 많은 구전의 사료를 얻어내어 당시 200만원의 예산으로 사료수집, 원고집필, 편집 등의 작업에 영안반점의 짜장과 우동으로 끼니를 이어 가면서 편집, 교정까지 무보수로 기여 헌신했었다. 발간비는 500여만원의 군예산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지난 1994년 4월 발간된 <영광군지>(1534쪽, 발행처 : 영광군, 인쇄 : 광주영성문화사<영광 염산면 출신 정모>)는 편찬위원회 편집위원(서단, 조남식, 김영남, 이기태), 편찬위원 18명, 감수위원(현암 이을호 전국립광주박물관장, 정종 전동국대 동양철학박사, 전태갑 전남농대교수)으로 구성, 간행될 때 간행비 1,500만원의 예산에 맞추어 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고장 출신 감수위원인 전태갑 전남농대교수에게 재편집시켜 한자도 모르는 농대학생들의 작업과정에서 면도질식으로 원고를 쪼개 뒤죽박죽 '비빕밥'을 만들어 버렸기에 필자가 제출한 많은 원고 분량마저도 없애 버렸고, 인쇄과정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쪽수를 줄여 출판해 버렸기 때문이다.
9년만인 지난 2002년 12월 간행한 <영광군지>(상권 1053쪽, 하권 1985쪽, 발행처 : 영광군, 인쇄 : 영광옥당인쇄사) 개정판 발간(편찬위원회 38명위원 중 편찬위원 겸 감수위원 : 조남식, 한희천 군에서 편의 형식상 구성한 것임) 마저도 지난 1994년 4월에 간행했던 영광군지에다 재개정 보완했으니 오류 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일은 예산절약 차원에서 영광군에서 공직자가 했지만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영광군지> 발간에 앞서 이의 기초가 되는 '마을사'가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지난 2001년 12월 우리고장 불갑면의 마을사(史)를 엮어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내는 꿈을 꾸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감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라도 빠지지 않은 충분한 사료(자료)에 의해서만 '마을사'가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1945년 광복전후의 변천(농경사회∼산업사회)화 과정 실상(환경)에 따른 자료(사료)등이 전혀없는 상황하에서 더구나 광복이후 6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마치 불탄 뒤 잿더미에서 '금'을 찾는 일에 비유할 만큼 '마을사'를 이뤄낸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시기를 놓친 '사후약방문'격이 되고 만 시점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지만 현재 있는 것이라도 이뤄낸다는 작심에서 해낸 '마을사'를 문화의 21세기 첫해인 신사(2001)년 '지역문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첫 출발점에서 영광군내 11개 읍·면의 첫 번째 <불갑면 마을사>를 발간하게 된 것은 우리고장으로서는 사상(史上) 처음있는 '마을사'간행으로써 향사(鄕史)적 의미가 크게 담겨져 있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지난 1970년대 새마을사업(지붕개량, 부엌개량, 소도시 및 농촌 도로확장·개설 등)을 계획 추진할 때 사전에 본원에서 필자가 직접 영광군에 관내 11개 읍·면 마을자료(사료) 조사·수집사업을 함께 연계 병행하자고 제의하고, 이의 재원지원을 요청했었으나 향토문화의식이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가시적인 건설개발과 소득증대 등에 투자비중을 두었기에 유무형의 향토문화 부가가치에 투자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에 비유할 수밖에 없었다.
회고하건대 필자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연계 병행해 사전에 1945년 전후의 모든 마을자료(사료) 조사·수집을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따름이다. 만약 그 당시 영광군이 본원의 제의 요청에 응해 새마을사업과 함께 연계 병행해 마을사의 자료조사·수집·보존을 했더라면 오늘날 <마을향사>와 <군사(지)>를 엮는데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창출했을 것이고 이에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원은 무척 어려운 여건이 많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1997년부터라도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지금이라도 '시작의 반'이라고 <마을향사<鄕史>)의 사료(자료)조사·수집·보존을 우리 세대때 하지 않으면 후세대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움이 뒷따르기 때문에 이를 후세대들에 물려줘 이의 사료기록 유산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기에 현재있는 그대로를 기록으로 남겨두면 이를 토대로 후세대들이 할 수 있도록 본원은 향토사료 조사·수집·보존사업을 충분치 못한 예산 범위내에서 불갑면 30개 마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연차적으로 조금씩 해온 것이 불갑면, 묘량면, 대마면, 군서면, 군남면 마을의 사료(자료) 조사·수집을 완료하고 공람을 거쳐 지속적인 미비된 자료보완중에 있으면서 2004년부터 염산면 1차 일부 마을사료 조사·수집 중에 있다.
우선 처음 간행된 <불갑면 마을사>의 내용이 흡족하고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이를 지적하고 부족된 부분과 빠진 내용 등을 보충해 준다면 훗날 취합해서 증보판 부록으로 간행할 것이다.
<불갑면 마을사>를 제일 먼저 간행하게 된 것은 우리고장 11개 읍·면에서 역사·문화적으로도 우리고장 11개 읍·면에서 대표적인 백제불교의 진원지 불갑사를 비롯한 유무형의 역사문화와 정신유산의 숨결이 스며있는 곳으로 타읍·면지역보다 많이 담겨져 있을 뿐 아니라 자연환경 또한 으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풍부한 불갑저수지의 수자원이 불갑 군서 군남 염산 백수 5개 읍·면의 5천여정보의 광활한 평아 농경지를 젖셔 줄 유일한 젖줄을 보유하고 있다. 또 불갑저수지가 관광자원으로도 큰 몫을 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정신적 지주의 인물로는 불교계를 크게 빛낸 백학명(白鶴鳴) 대종사와 정유재란때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 유학을 뿌려 일본 국학(國學)의 시조 후지하라세이카를 탄생시킨 수은 강 항 선생(2001년 3월 문화인물 지정)이 탄생한 지역이다.
우리고장의 문화재 현황목록을 살펴보면 49지정 목록(국가 2, 지방 47) 국가 및 전남도지정문화재 유산에서 31지정목록(국가2, 지방29), 비지정 문화유산이 71중 32비지정목록이 불갑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셈이니 어찌 불갑면이 우리고장을 대표하는 역사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유보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듯 우리 불갑면지역 마을사를 우리손으로 조사·수집·취합·정리해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지방화시대와 지역문화시대에 있어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더구나 우리 불갑면 지역에 흩어져 있던 사료(자료)를 발굴하고 새로운 시작으로 접근해 향토사의 맥을 찾는 일은 지역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라면서 꿈을 키웠던 발자취의 숨결이 스며있는 고향에 조상의 흔적 등을 다시 확인하고 정리함으로써 묻혀지고 잃어버릴 뻔한 중요한 사료들이 후세에 빛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의 값진 기록유산으로 소중히 남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료들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과 폭넓은 자료수집 그리고 심혈을 기울인 정리와 편집 등으로 이처럼 많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여 이의 값진 책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과업을 감당한다는 것은 마치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지고 험준한 태산중령을 넘는 것 같은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를 것을 각오하고 오직 자랑스럽고 실령스러운 빛고을 '영광인'이라는 긍지와 사명감으로 일관할 것을 부언하면서 끝을 맺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