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서운 전염병 환자가 아니다”
소외속에 더 소외된 이웃 영민농원
2005-02-11 박은정
편견, 고독 그리고 가난…
“여름에 비라도 올 때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어디하나 온전한데가 없는 집이라도 좀 고쳐줬으면 좋겠어”라며 멀리 허공을 응시하는 마을의 한 노인. 그를 만난 곳은 영민공소 옆에 자리한 조그마한 천주교 공동체인 영민농원의 사무실. 그곳에서 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영민농원은 묘량면 덕흥리에 위치해 있다. 소록도에서 분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1970년부터 영광읍 녹사리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중 주민들의 반대로 1975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정착해 살고 있다.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이 사회에 나서지만 곳곳의 냉대와 차별에 쫓겨 다시 정착촌으로 오고 있지”라며 긴 한숨을 내뱉는 농원의 서복기 할아버지는 올해 꼭 80을 맞이하는 마을의 나이가 최고 많은 고령자이다.
그는 “우리처럼 몸이 이런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무엇을 할 수도, 그렇다고 편안하게 외부세계에서 일반인들과 어울릴 수도 없는 우리같이 철저하게 소외된 불쌍한 사람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야”라며 오랜세월 동안의 고립과 멸시에 대한 한숨 어린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모두 같은 병과 같은 아픔을 간직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모여 살고 있는 그들. 이들도 다른 지역의 한센병 환자촌처럼 돼지를 기르며 생계를 유지해 갔다. 그러나 한센병의 후유증으로 손 발이 굽고 몸이 마비되는 등 장애가 심한 이들이 돼지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 현재는 돼지를 키우던 폐사만 덩그러니 흉물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다.
모두 18세대가 모여 있는 영민농원은 한센병 환자들과 그의 2세들까지 모두 50여명이 살고 있다. 한센병 2세들은 환자가 아니지만 ‘미감아’ ‘문둥이 자식’으로 불리며 환자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현재 전국에 흩어져 있는 88개 정착촌에는 한센병 2세 1만여명이 그들의 부모인 한센병 1세대와 함께 살고 있다.
영민농원 조상덕 원장도 한센병 2세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부모와 소록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그. 그는 “아주 어릴적부터 20살 무렵까지 감염에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보건관리자들이 하루 3번 입안 가득 약을 털어 넣으며 강제로 약을 먹였었다”며 “한센병 약이 무척 독해 고생을 많이 했었던 기억이 지금도 소름끼친다”고 한센병 2세들이 겪는 설움과 고통을 털어놓았다.
그는 한센병 2세인 아내와 결혼을 했고 자녀를 두고 있다. 그의 부모는 이곳에서 생활하다 모두 돌아가셨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고 주민들의 심부름꾼으로 그리고 대변자로 그들을 지켜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조상덕 원장은 “영민농원의 입주자들은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며 “그나마 얼마 전 지어진 양로원에 4가정이 입주해 조금 나은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나머지 주민을 위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고 전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고 게다가 대부분이 장애인이다 보니 마을 운영이 무척 힘든 상황이다. 다른 이웃에 비해 도움의 손길이 더욱 인색한 곳영민농원. “밖에 나가 마음 편히 자장면이라도 사먹는 게 소원입니다”라며 털어놓는 그들의 짧은 하소연이 많은 것을 시사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조상덕 - 영민농원 원장
“편견없는 관심과 사랑 가장 필요”
영민농원 가족들은 생계수단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생계보조비가 전부이다. 일반사회에서 활동하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들은 정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해 가지만 이곳 주민들은 오로지 그것이 수입 전체인 것이다. 정부당국은 환경과 여건에 따른 수급의 범위를 조절해 어려운 한센병 환자에게 혜택을 조금 더 줘야 될 것 같다.한센병은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는 인식전환을 부탁한다. 또 다른 정착마을은 갖가지 보조와 지원으로 이곳보다는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지역주민과 관계기관의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리며 지원이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민농원의 가족들은 편견없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가장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