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영광21시론 - 정금안 / 영광여성의전화 집행위원장
2005-02-17 영광21
“그래도 선물은 많이 받으셨지요?”하고 여쭈니 표정이 환해지시며 불룩한 안 호주머니를 툭툭 치시는 게 자식들이 용돈을 두둑이 챙겨드린 모양이다. 자식들의 온기가 배여 있는 그 돈은 아마 다음 명절 때까지 자식들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힘이 될 것이다.
설 명절 즈음, 나도 아주 따스한 선물을 받았다. 올해가 시작되면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심하던 중에 한글공부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는 영산아짐의 전화는 내 고민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그날부터 밤7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나는 우리만의 은밀한 즐거움이 시작됐다.
날마다 즐겨보던 연속극을 포기하는 대신 한 글자씩 배워가는 기쁨은 커져갔고, 영산아짐은 혼자 배우는 게 아깝다며 친한 동무 2명 더 불러 모았다. 둥그런 밥상에 마주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평소 쓰던 말을 글로 써 보고, 때론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적어보고 유행가도 소리 높여 불러도 봤다.
특히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고 쓰고 노래하며 감격해 하실 때는 내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 하루 내내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가도 공부시간만 다가오면 거짓말처럼 말짱해져서 달려오게 된다며, 공부하는 재미에 하루해의 짧음을 탓하는 아짐들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오히려 내가 받은 감동이 크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양반들이 작당(?)해 늘그막에 글자 배운다고 날마다 힘들게 해서 면목이 안 선다며, 작지만 활동하는데 차비라도 하라며 흰 봉투를 내밀어 날 당황하게 하셨다. 같은 여성으로 시대를 잘 만나 조금 더 배운 내가 시대를 잘못만나 덜 배우신 당신들께 조금의 시간을 내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음치인 내가 날마다 노래를 두 세곡씩 배워 가는데 그럼 나도 무얼 드려야 하는가? 정 마음이 불편하면 열심히 배우셔서, 나중에 배우길 원하는 분들께 가르쳐드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사람 살아가는 정이지 않겠느냐고 하니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신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나의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2월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 1월말에 끝내기로 했다. 마무리하는 날, 집으로 가려는 내 손을 붙잡더니 자전거에 커다란 보따리를 실어주셨다. 놀라는 내게 곧 설날이 다가오니 그때 쓸 떡국떡을 미리 조금 더했으니 나눠먹자고 하셨다.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조금만 가져가겠다고 하니 “어른들이 고마워서 주는 정을 거부하면 안 된다”며 화난 표정을 지으셔서 “그럼 맛있게 잘 끓여 먹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집에 와서 보따리를 풀어보니 설날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서 나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이튿날 몇 개의 봉지에 떡들을 담아서 떡국을 좋아할 것 같은 젊은 여성들에게 선물했더니 그 좋아하는 모습이란 ‘자매애는 강하다’는 뜻을 새삼 실감했다. 함께 하는 시간동안 그분들과 나는 나이와 세대차를 뛰어넘는 뜨거운 자매애로 충만했었고, 그분들의 따스한 사랑이 젊은 여성들에게 영양분이 돼 그들의 몸을 덥혀주고 그 힘으로 꿋꿋이 거친 세파를 헤쳐가길 빌었다.
음력 새해 첫날 끓여낸 떡국이 유난히 맛있다고 아이들이 칭찬하니 나도 모르게 으쓱해진다. “애들아 그건 그냥 떡국이 아닌 사랑 이란다!” 훈훈하고 따뜻했던 올 명절선물,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