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 조창기능 마비 동학군 위세 펼쳐
영광지역 근현대사조명 - 동학농민운동과 영광 ②
2005-02-25 영광21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영광군에 둔취(屯聚 :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음)해 5리씩에 복병을 두고 30리에 2,500명씩 그 세가 아주 넓고 커, 날로 더하여 몇 천명인지를 알 수 없다. 사방에서 따라 모여들며 각처에 오가는 서자(書字) 연락이 번개와도 같이 빠르다고 했었다. 이 같은 전문보고를 접한 서울에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 포도청 장교의 정탐을 지시했는데 이도 역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학군 통문 “민폐근본은 이포”
영광에 둔취한 동학농민군은 매일 진법을 조련하고 매일 밤에 경문(經文)을 송독(誦讀)하는데 5~6,000명 가량씩이고 영광 무장 등지에 가장 많다고 했고, 영광일대를 휩쓴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했었다고 한다. 법성포 이향(吏鄕)에는 이미 4월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동학군 통문이 날아들었었다.
‘민폐의 근본은 이포(吏逋)에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탐관으로 말미암음이요, 그것은 또 집권자의 탐람이 근본이다. 이(吏)와 민(民)은 다름이 없어 이(吏) 역시 민(民)임에 틀림없으니, 공문부상(公文簿上)의 이포는 모두 보고하라’고 했었다. 동학군이 또 한편으로는 법성포 이향에 나붙었던 개혁조항이 처음에 권귀진멸(權貴盡滅), 왜이축멸(倭夷逐滅)을 표방하고 내정(폐정)개혁을 요구해 들고 일어났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내정개혁의 조목을 포고하기도 했던 동학통문은 ‘전운영(轉運營)이 이민에게 끼치는 폐(弊), 균전관의 거폐생폐(폐해를 없애려다가 도리어 딴 폐해가 생김), 각 시정(市井 : 인가가 모인 곳 = 시가)에서의 분전수세(푼돈까지 거둬 들이는 세금), 각 포구에서의 선주(船主)의 늑탈(강탈 : 억지로 빼앗음), 타국잠상(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법령으로 금지된 물건을 몰래 파는 외국상인)의 준가무미(미곡값보다 무역 물건값이 더 높음), 염분(鹽分)의 시세(市稅), 각종 물건의 도매취리(도매물건에도 이익을 많이 얻음), 백지징세(고지서없이 세금을 받음), 사전기진(거친 땅을 일구어 묵은 밭으로 만든 개인 소유의 밭땅), 와환(누어서 되돌려 받음)의 발본 등등 폐막(없애버리기 어려운 폐단)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법성포, 동학군 활동에 세곡수송 마비
그러나 무릇 사농공상 사업(四業)의 민(民)은 동심, 협력해 위로 국가를 돕고, 밑으로 빈사(죽음에 임박함)에 빠진 민생을 편안케 하는 것이 어찌 행(幸)이 아니겠는가’라고 법성포에 써 붙여 포고했던 것이다. 당시 법성포는 조창이어서 전라도 세곡(稅穀)을 나르기 위해 배의 출입이 잦은 고장이었는데 동학군들이 법성포에서 전운선을 몰아내 세곡의 수송이 두절될 지경이었다.
동학군이 영광을 점거하고 있을 때 경군(京軍 = 官軍)을 군산포에 상륙시킨 전운선 한양호(漢陽號)가 세곡을 실으려고 법성포에 들어 왔을 때 50~60명의 동학군이 나타나 화승총(火繩銃), 창검, 죽창을 들고 전운선 한양호에 뛰어올라 전운국원 김용덕과 일본인 항해사 나가노겐지로, 기관수 도구나가아사지로 등 5명을 새끼로 동여맸다. 동학군은 이들을 해안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끌고 가서 두들겨 눕혔다.
법성포구에서는 일본 상인이나 선박의 내왕이 잦았고, 일본에서 가져온 각종 잡화와 석유같은 것을 비싸게 팔고, 한편으로는 쌀을 싸게 사서 실어 나르기에 바빴었다. 객주나 여각은 물화를 중개 알선해 주는 것이었다.
고종, 민폐시정 약속하며 해산요구
동학군은 이들 객주나 여각을 습격하니, 객주 주인은 일본 상인과 같이 도망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또 정부대로 객주 한 집에 대해 돈 100관문(貫文)씩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법성포 이향에 나붙었던 동학군의 폐정개혁 요구조항 안에는 이렇게 해서 전운영의 폐라든지, 타국잠상의 미곡 매출(賣出), 각종 물건의 도매취리 등의 폐지요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영광에서 나흘을 머무른 승승장구의 동학군 1만여명은 4월16일에는 3~4,000명이 영광에 머무르고 함평으로 6~7,000명이 남하했다. 4월21일 오전까지 영광에 체류하며 다음 작전에 대비하게 된 동학군은 깃대와 창검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위세를 올렸고 기마자(騎馬者)도 100여명에 이르러 그 중에는 갑옷을 입고 전립(戰笠)을 쓴 자도 섞여 있었다.
초토사 홍계훈은 당초 동학군을 추격할 생각을 못하고 정부에 전보를 쳐서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정부는 장위영(壯衛營) 병정 300명과 강화병(江華兵) 500명을 원병(援兵)으로 보내기로 했다. 4월19일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는 이들 관군을 거느리고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떠나 영광의 법성포로 향했다. 동학군이 영광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초토사 홍계훈은 증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잔여군졸을 이끌고 전주를 떠나 영광에 왔던 것이다. 이미 동학군이 영광에서 함평으로 떠난 4월21일 오후에 홍초토사군(軍)은 먼저 왔고 증원군은 4월23일 법성포에 상륙, 영광에서 합세됐다.
한편 정부는 민요의 책임자를 처벌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18일 삭직처분을 당했고, 4월19일 고종은 윤음(綸音 : 임금의 말씀)을 전라도민에게 내려서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선포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민론(民論)에 따라 시정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동학에 가세한 농민군은 아무런 벌도 가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라고 타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의 수습책에 동학농민군은 불신하는 정부를 믿고 쉽게 응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