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군단위 최초 거사·3월15일 독립선언식 거행

근현대사 조명 7 - 3·1운동과 영광 ②

2005-04-06     영광21
넷째 3·1운동은 세계 피압박 국가의 민족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스와라지 운동 그밖에 인도차이나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자유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3·1운동은 우리민족의 가장 높고 큰 봉우리일 뿐만 아니라 세계 약소민족에게 자주독립의 희망과 의기를 북돋아 준 세계사적 운동이요, 온 누리의 평화와 정의와 양심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탑이다.

86년 전 오늘 일제의 갖은 압박하에서도 떳떳이 들고일어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창림탄우뢰 위란속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부르짖던 조상의 고귀한 자유독립정신에 필자는 영광의 3·1운동사를 집필하면서 새삼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는 바이다.

영광에서도 서울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진지 13일만인 3월14일, 3월10일의 광주거사후 4일만에 이어 군 단위에서는 영광군이 최초의 거사로써 제1차 만세 시위거사에 참여한 주모자 이병영(李炳英·영광보통학교훈도) 정헌모(鄭憲模·동교3학년 생도) 허 봉(許 奉·동교2학년 생도) 조술현(曺述絃·동교1학년 생도) 조철현(曺喆鉉·서울 유학생), 15일에 벌어진 제2차 만세시위거사에 참여한 주모자 김은환(金殷煥) 정인영(鄭仁渶) 조희방(曺喜芳) 박정순(朴正淳) 서순채(徐淳彩) 유두엽(柳斗燁) 김준헌(金焌獻), 27일에 벌어진 제3차 만세시위거사에 참여한 주모자는 동교를 갓 나온 소년층이 주도해 성공을 하지 못했지만 서순채 유두엽 김준헌 유봉기(柳奉基) 조병완(曺秉浣) 조희태(曺喜兌)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위계후 고경진 정신적 구심역할
영광의 3·1운동은 해인(海人) 위계후(魏啓厚)와 고경진(高暻鎭)이 정신적인 구심점이 돼 있었다. 유년기부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교분이 두터워 뜻을 같이 해오던 해인이 고하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서 3·1운동에 참가하고 당시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조철현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영광으로 가지고 내려가게 한 후 귀향해 청년회장 정인영(鄭仁瑛), 농민회장 김은환, 보통학교 훈도 이병영 등 제씨와 회합을 갖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거사를 숙의했다.

그리하여 3월14일 영광보통학교 생도 300여명이 박태엽과 이병영 등 두 훈도선생을 선두로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다가 일본군 헌병과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박태엽과 이병영 훈도선생은 그 자리에서 검거됐다. 여기에 격분한 보통학교 생도와 졸업생들은 이날 '훈도선생을 석방하라'는 구호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서 앞까지 시위를 하다가 왜군 헌병과 경찰에 의해 주모자 정헌모 학생외 12여명이 검거되고 많은 부상자를 냈다.

3월14일 영광보통학교 첫 시위
한편 거군적으로 대대적인 거사를 계획해 오던 청년회와 농민회는 거사일을 3월15일 오후 1시로 결정하고 각 면에 격문을 띄우는 한편 태극기 3천여매를 밤을 세워가며 제작완료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거사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3월15일 오후 1시가 되자 영광읍 남천리 소재 박정환(朴靖煥)의 직물공장은 각 면의 농민회 회원과 청년회 회원, 그리고 보통학교 생도와 졸업생들까지 모여들어 가히 입추의 여지도 없이 꽉 차 있었다.

이날 여기에 모인 1,500여명의 군중들은 감격과 흥분속에서도 엄숙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김은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삼창에 이어 시위행진에 나섰다. 시위군중이 남천리와 도동리를 거쳐 무령리 경찰서 앞에 이르기까지 정인영과 박정순(朴正淳)은 인력거에 타고 선두에서 군중을 격려하며 대열을 지휘했고 김은환 조희방 박병문 조병현 유두엽 서순채 등은 시위군중의 대열에 끼어 군중을 격려하니 군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시위군중 경찰서 구내까지 쇄도
이때 시위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몰려온 왜군 헌병과 경찰은 사거리에다 진을 치고 시위군중을 기다리고 있다가 시위군중의 대열이 당도하자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계속하다 성난 군중에게 밀려 급기야는 시위군중이 경찰서 구내에까지 쇄도하니 당황한 왜군 헌병과 경찰은 시위군중을 잔인하게 무차별한 구타를 하다가 그도 모자라서 발포까지 하여 수십명의 부상자를 내고 정인영 김은환 박정순 등 20여명이 이 날 왜경의 손에 검거됐다. 이를 지켜본 군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일반 시민들은 왜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3월15일의 거사 이후 왜경은 계속 경계를 엄중히 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을 색출·검거하게 되자, 조주현(曺柱鉉) 유선기(柳善基) 김형모(金衡模) 등은 일시 몸을 피해 만주 등지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험악한 상황속에서도 영광의 젊은이들은 계속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모의해 거사일을 3월27일 정오로 정하고 거사 전날 밤에 영광읍 사거리 일대의 전주와 점포에 '대한독립만세'라 쓰인 벽보를 첨부하고 수천매의 전단을 만들어 각 가정과 노상에 살포해 놓고 다음날 정오를 기해 영광청년회 회원, 보통학교 생도, 졸업생 등 200여명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영광읍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왜경과 충돌해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주모자 김은환 정인영 조희방 박정순 조병현 박병문 유두엽 서순채 김준헌 유봉기 조병완 조희태 등 12여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영광문화원 - 조남식원장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