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명 10 - 3·1운동과 영광

위계후 선생의 활동

2005-04-28     영광21
8개월 고문조작으로 만들어진 체육단사건 주동
1937년 9월16일 '동방약소민족 옹호' '대한독립만세'라 쓰인 벽보를 왜경들의 손으로 조작해 영광읍 사거리의 전주에다 붙여놓고 다음날인 17일 밤부터 영광에 있어 반일사상의 소유자로 보여지는 지도층 인사 300여명을 검거한 것이다.

당시 전남경찰국 고등계의 원흉인 노주봉 경부의 진두지휘아래 취조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사건을 날조한 것인지라 혹독한 고문으로 일관했으나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체육단이 창단된 동기(1934년), 서울YMCA에서 닐스북체조(정말체조)를 배운 이을호(李乙浩)가 고향 청년들에게 닐스북체조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한 조기회가 체육단의 시초가 된 때부터 1938년 4월12일까지 활동을 통해 민족단합을 꾀하며 배일감정을 깔고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것 아니냐고 무려 8개월 동안 계속 고문해 날조한 사건이 바로 <영광체육단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류돼 목포검찰청으로 송치된 사람은 위계후를 비롯한 45명으로서 그 중에서 재판에 회부돼 실형을 받고 복역한 인사는 위계후 조주현 나질정(羅瓆渟) 남궁현 등 4인이고 나머지 인사 41명은 1939년 2월8일 예심면서처분(豫審免訴處分)을 받고 무려 18개월만에 석방됐다.

해인은 결국 이때 왜놈들에게 당한 모진 고문으로 골병이 들어 1941년 2월 출감해 줄곧 병석에 누어 신음하다가 1944년 6월22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부음을 전해들은 온 군민과 전국의 애국지사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여들었고, 군민의 뜻에 의해서 장례를 영광군민장으로 결정했다. 장례를 주관한 청년회에서는 당초 영결식장을 영광초등학교 교정으로 정했으나 왜경의 제지로 말미암아 영광유치원에서 군민의 애도 속에 엄숙히 거행됐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영광군민들의 투철했던 민족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해인이 이 고장에 끼친 덕과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오늘도 우리 군민의 마음속에는 그가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고장 여명기의 등불로 길이 숭앙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