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다 잘사는데 더 바랄 게 뭐 있겠어”

최명자 어르신 / 법성면 법성리

2017-07-14     영광21

“아휴 젊은 분들이 나같은 사람은 뭣하러 촬영한당가.”
무화과와 민들레가 소담하게 핀 단아한 마당에서 쑥스럽게 맞이해주는 최명자(86) 어르신.
전라도와 이북 사투리가 섞인 소박한 말투는 최 어르신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최 어르신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전쟁을 만나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다행히 이산가족이 생기진 않았지만 타지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남들은 다 부산으로 피난을 떠날 때 전라도로 왔다는 최 어르신은 11살 연상의 남편을 만나 법성면에 정착해 60여년째 살고 있다.
“우리 때는 시국을 잘못 만나서 고생 많았어. 전쟁통에 여까지 내려왔지”라며 과거를 회상하는 최 어르신의 눈가에 고향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시숙, 시동생 다 한집에서 살았어”라는 최 어르신은 “남편은 뱃일하고 우리 때는 아들 낳아야 덕 보는 줄 알아서 6남매나 길렀어”라고 말한다.
최 어르신은 어려운 시절을 만나 고생했다. 없는 살림으로 6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던 최 어르신은 “나만큼 고생하지 말고 살라고 죽을 힘을 다해 자식들 갈쳤어”라고 말한다.
딸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최 어르신.
“아들 한명만 배워도 충분하다”는 남편의 반대에도 공부에 소질이 있던 자식들은 광주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그 당시 영광에서 광주로 학교를 보내는 것은 유학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식들이 공부도 잘했지”라는 최 어르신은 “첫째딸은 목사허고, 둘째딸은 사모허고, 셋째딸은 장로허고, 넷째는 권사허고 있어”라며 웃음을 짓는다.
16년전 남편과 사별했지만 효심 많은 자녀들 덕분에 외로운 줄 모른다. 최 어르신은 얼마전에도 서울에 있는 딸 집에 한달간 머물다 왔다. 명절에는 광주에 사는 셋째딸 집에 다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는 최 어르신.
녹내장으로 조금 고생했지만 수술을 받고 지금은 안경도 없이 성경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하다.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사는 어르신의 장수비결은 요가와 에어로빅.
많은 연세에도 꼬박꼬박 운동을 나가는 최 어르신은 가장 나이가 많고 열정적인 수강생이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는 최 어르신은 “자식들 건강하게 열심히 살고 나라가 잘 돌아가길 바랄 뿐이지”라며 소박하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