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대법원 판결문 청년의 독립의지 반증

근현대사 조명 12 - 재판기록을 통해 본 영광 3·1운동 ①

2005-05-12     영광21
영광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3월14일 영광보통학교 학도들에 의해서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훈도(訓導) 이병영(李炳英)이었고 그가 조종한 학생대표는 3년생 정헌모(鄭憲模) 2년생 허봉(許奉) 1년생 조술현(曺述鉉) 등이었다.

이 훈도에게 정보를 주는 등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서울 유학생 조철현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몇가지의 근거로는 이 훈도의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서 '피고는 3월상순 영광청년중 수명의 내담(內談)이 있어…'라는 부분이 있고 조철현의 복심법원(覆審法院) 심문조서중에 '나는 대정(大正) 8년 3월3일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장의식(葬儀式)에 참여하기 위하여 경성에 갔다가 동년 12일 귀향한 이래 독립만세 고창(高唱)을 계획하고 있었다.' 또 조철현은 검찰에서 진술하기를 '당일 나는 보통학교 생도들과 같이 만세시위의 최선봉(最先鋒)에 섰었다.'

이상의 내용들을 연결시켜보면 이 훈도가 말한 내담한 영광청년중에는 분명히 조철현이였고, 이 훈도의 나이 26세, 조철현이 2년 연하이니 피끓는 양 지사의 의기투합은 불문가지이다. 이 훈도는 원래 진도사람으로써 영광은 객지일 뿐 아니라 외부의 정보에 어두웠다. 또한 시위운동이라는 거사를 도모하기 위하여는 지방 유력자의 지원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일로 일본법정에 서게 된 조철현은 1920년 2월 목포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대구의 상급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당하고 말았다.
한편 이 훈도는 초심에서 2년 징역, 복심에서 8월 상고까지 갔으나 기각을 당하였다. 이에 이병영 훈도의 판결 이유를 소개한다.

(1) : 대정8년 3월상순 이태왕 전하의 국장에 관하여 전생도들에게 이피고는 조선독립운운하면서 이태왕 전하에 관한 비애의 정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일본으로부터 10만엔이라는 거대한 국비를 가져다가 국장을 치루었음에도 감사는 커녕 고래의 조선식으로 하지 않고 일본식으로 하여 전하에 면목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2) : 대정8년 3월10일경 이 피고는 정헌모라는 생도를 교실로 불러 당시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소요사건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피고가 암암리에 선동하며 예의 운동을 하게 한 사실이 있다.

(3) : 동년 동월 12일경 이 피고는 허 봉이라는 생도에 대하여도 예의 운동에 관하여 준비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본 증인이 4, 5명이나 있다.

(4) : 동교 교장 길전심지(吉田甚之)의 진술에서 동교 학도가 시위행진을 할 때 본 피고가 지휘하는 것 같이 보였고 당시 아동들은 경관으로부터 제지당하여 기히 대다수가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학교에서 교장사택으로 또 군청과 경찰서를 돌면서 현장에서 암시적으로 학생의 시위를 격려하였다.

(5) : 원심(原審)의 증거에 의하면 피고는 영광보통하교 생도를 선동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고자 결의하여 동교 생도 정헌모를 교실에 불러 목하(目下)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하여 동인의 감상을 물어봤고 조선인은 지금 행동을 결박당하고 있으니 과감히 그러한 결속을 면하려면 너희들이 한시 바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여 독립운동의 개시를 결의하게 하였으며 동교생 허 봉에 대하여도 목하 각지의 모의에 관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한 준비가 있느냐고 질문하여 암암리에 도발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정헌모 허 봉은 피고의 선동과 교사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을 결행키로 협의하여 동교 생도 약 150명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한 사실을 인정한다.
다음은 학생대표인 정헌모 허봉 조술현에 대한 재판기록중 판결이유를 중요부분만 소개한다.

(1) : 피고 정헌모는 이병영의 선동교사에 의하여 동월 13일 영광면 백학리에 있는 피고 조철현의 집에서 자기와 허 봉외 9명에 대하여 상가와 같은 의도를 고하고 피고 허 봉 조술현외 수명은 당시 찬동하여 다음 14일 그 운동을 실행키로 협의하였다.

(2) : 피고 정헌모와 허 봉은 상의 끝에 동교와 다음 14일 오전 서면과 구도로써 동교 각급 학생 중 모모한 자에게 참가를 권유하였고 동면 교촌리 김두학(金斗學) 집에서 구한국(舊韓國)국기 백수십본을 제작하여 동일 동교 수업 종결 후 전교 생도 약 150명에게 분배 휴대시켜 먼저 교정에 모이게 해놓고 모두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정헌모 허 봉 등이 앞장서고 피고 조술현 등 생도 모두는 집단으로 동면 교촌리를 출발 도동리 방향으로 만세를 부르고 진행함으로써 공공의 치안을 방해하였다.

(3) : 증인 근등용(近藤勇) 영광경찰서 순사부장에 대한 신문조서에 의하면 자기는 3월14일 영광읍내로 향하여 도동리 방면의 함평경로부터 학교생도 약 100명이 구한국 국기를 손에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리며 행진해 오는 것을 차단하여 해산을 설유하였다. 당시 오후 5시경이 되자 시위 집단이 해산하였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