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영배 도의원 예비후보 영면
“자신의 아픔에도 다른 이를 축하해 주던 사람”
4월의 이른 봄날, 촉망받던 한 정치인이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다.
1일 오전 10시30분 평소처럼 선친의 산소에 방문해 돌아오던 고故 박영배 도의원 예비후보는 등산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10여분도 채 지나지 않아 등산객들은 400m가량 떨어진 인근 저수지에서 고인의 차가 가라앉는 것을 발견했다.
소방당국은 차가운 물속에서 고군분투했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탁한 시야로 인해 난항을 겪었다. 오후 7시14분 고인을 발견했다.
그는 지역을 먼저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1990년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젊은 나이에 영광군청년회의소에 입회해 1998년 영광청년회의소 제24대 회장을 역임하며 7개 읍·면청년회와 함께 영광군청년단체협의회를 구성했고 초대회장으로 청년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는 철학과 소신이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지난 2014년 6·4 지방선거 개표결과 직후 본사의 기자는 그가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었다고 회고했다. <2014년 6월5일 개인SNS에 올린 내용 우측 참조>
자신의 낙선이 확정된 저녁, 늦은 시간에도 당선자들을 만나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넨 행동은 그의 품성과 자세를 반영한 한 단면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는 소탈하고 겸손한 이웃이었다. 그는 한 가정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좋은 사람이었다.
3일 고인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장지는 묘량면 덕흥리에 위치한 선산에 마련됐다.
이번 지방선거를 지나오면서 기자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유권자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화가 나기도 했다. 자기자신이 왜 출마를 하는지에 대해 200자 원고지 3장 쓰기가 힘들어 대충 지어 쓰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랬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지만 주민 한사람 한사람을 다 만날수 없어 지면을 빌어 자신을 밝히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선거운동을 하며 한없이 등을 굽히고 고개를 조아리며 하는 말처럼 군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출마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위해 출마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고 정말 화가 났다.
왜 내가 정치를 하는지 철학과 소신을 밝히기에 200자 원고지 3장은 부족하면 부족했지 많지는 않다.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에 쫓기니 여유가 없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정치인들이 외부 기고나 연설문 등 보좌관 등이 작성한 것을 자신의 이름을 쓰거나 보고 읽는다.
노무현 전대통령도 그랬다. 그를 대신해 글과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윤태영 비서관은 그의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이건 자네 글이지, 내 글이 아니네”
그동안의 연설 내용이나 말한 내용들을 참고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단다.
그렇다. 정치인의 글에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있어야 한다. 생각이 없으면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선거가 끝난 오늘, 누군가의 낙선이 이렇게 안타깝다.
그는 선거에 몇번 떨어지면서도 항상 출마를 할 때면 “저녁내 생각해서 썼는데 잘 썼는지 모르겠다”며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흔적이 가득한 종이를 들고 신문사를 직접 찾아왔다고 한다.
자신의 낙선이 확정된 저녁 늦은 시간에도 가슴이 쓰릴만한데 당선자들을 만나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그가 어떤 정치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왜 출마를 하는지는 알았던 사람인 것 같다. 진정성이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앞으로 4년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주민들을 더 만나고 더 들어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힘이 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그보다 세상을 한참은 덜 살아온 까마득히 어린 내가 감히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에 대해 고故 박영배 예비후보는 당시 “누군가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플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내 부덕의 소치인 것을 너무 감명있게 읽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2014년 6월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