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명 14 - 재판기록을 통해본 영광 3·1운동

3차 항일 독립만세운동 학교 갖나온 소년층 주도

2005-06-01     영광21
3월중에 영광읍에서 만세운동이 세차례나 있었는데 14, 15일 양일의 시위가 성공한데 대하여 27일을 기하여 계획됐고 시위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1차 시위의 주도집단은 영광보통학교의 생도들이었고 2차는 그 학교의 졸업생들이며 3차도 2차와 같다.

그러나 3차에는 2차와 다른 성격을 부여할 수가 있다. 2차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은 대부분이 진즉 학교를 졸업한 30대 청년층이었음에 반해 학교를 갖나온 소년층이 주도했다는 데에 비록 성공을 하지 못했지만 주동인물 중 서순채 유두엽 김준헌 등이 2차시위 대열의 선봉에 섰었던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당시 전남도장관(현 지사)이 조선총독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미발에 방지한 건>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한국독립운동사 p.834). 3월27일 영광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전회(前回) 소요시 구금됐던 생도의 방면을 요구할 목적으로 동교 생도를 선동해 소요를 일으킬 계획 중임을 탐지하고 익일(翌日) 28일 오전9시 대한독립만세라는 크게 쓴 기(旗) 두개와 태극기 그리고 그러한 것을 만드는데 사용했던 콤파스, 물감 등을 압수, 수모자(首謀者) 5명을 검속함으로서 이후 평온함.

다음은 대정 8년 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결이유 중 주요부분만을 인용하여 당시 정황을 파악하는데 참고하고자 한다.

(1) 피고 서순채 김준헌 유봉기 조병완 등은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기 위해 동월 27일 다수의 조선인들이 동 목적하에 공동으로 동군 영광읍내를 2차때와 같은 형태의 시위운동을 행하기 위해 선동하기로 상모하고 동월 26일 피고 유봉기의 집에서 구한국 합병전 동국내에서 연소자제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유년필독(幼年必讀)의 서책중에서 '수(隋) 당(唐)은 우리의 패장(牌將)이오, 일본은 우리의 제자(弟子)로다.

독립의 권리를 잃지 말고 세계일등 우리 대한' 등의 두 단구(短句)를 인용해 애국가라 칭하는 것을 만들어 그것을 약 20매 동 영광면 부근의 인도에 뿌리도록 유봉기는 지시했고 조병완과 조희태는 그에 따랐다.

"일본은 우리의 제자로다"
남천리 사거리 부근 노상에다가 26일 야음(夜陰)에 살포 익(翌) 27일에 피고 유봉기 조병완 서순채 김준헌은 동리(同里) 이발점인 유두엽 집에서 회합해 구한국 태극기를 수본 제작 준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운동을 하기 위해 부근의 학생들에게 권유하는 선동행위를 했다.

(2) 피고 유봉기는 동월 26일 유년필독의 서책 중 애국가를 20여매 조병완은 애국가 책을 빌려다가 26일 야간에 20매를 필사해 지시한대로 사거리에다 뿌렸다라고 진술

(3) 피고 조희태는 동월 26일밤에 피고 유봉기의 명에 따라 피고 조병완과 같이 예의 애국가 삐라를 사거리의 노상에 살포했다라고 진술

(4) 사법경찰관의 피고 서순채는 동월 27일 정오경 타인이 독립만세를 장날을 기해 부르자고 하기에 남천리 유(柳) 이발점에서 통행중인 학생들로부터 서명날인을 받았을 뿐 처음부터 만세를 부를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이고 보니 자연히 만세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써서 뿌린 사실은 동일 정오경 조병완으로부터 들었는데 그러한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나와 유봉기 조병완 김준헌 유두엽 조희태 등 6명이다. 우리들은 오후 2시에 모여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의한다는 뜻의 서명날인을 받았으며 태극기도 나와 유봉기 김준헌 3인이 만들었다라고 진술

이상의 행위들은 일제가 말하는 소위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1919년 5월6일 관할 법원에서 처형을 언도받았다. 그 형량은 다음과 같다.

▶ 서순채 : 영광면 교촌리 20세 징역1년 ▶ 김준헌 : 영광면 남천리 17세 징역1년 ▶ 유두엽 : 영광면 남천리 21세 징역1년

법성포와 여타지역 3·1운동
3월중에 영광읍내에서만 연3차나 시위운동이 일어나니 그 여파로 법성을 위시한 대마 불갑 군남 염산 백수 등지에서도 그러한 기운이 비밀리에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관해서는 산발적 시위가 있었다라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다만 미수에 머물렀으나 법성포의 경우만 자료가 보전되고 있다.

법성포는 원래 풍요한 어항과 번창한 해상교역 등으로 경제여건이 대단히 좋은 곳이다. 때문에 당시 영광못지 않게 외지로 유학중인 학생도 있었고 영광읍에 유일하게 신식학교가 있는 고장이었다. 역시 법성포도 영광에서와 같이 보통학교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한 것이다.

거기의 산파역은 나계형 훈도였는데 나 선생은 평소에 모교의 고향 후배들에게 배일사상을 주입하고 있는 터였다. 3월중에 연이어 일어나는 영광의 거사에 크게 자극을 받은 나 선생은 4월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장소는 중리당산(中里堂山) 밑으로 하였다.(신명희 증언)

때마침 귀향중이던 휘문학생 신명희와 학생이 아니던 유영태도 가담했다. 주축이 된 법성포보통학교 생도의 주동자는 박명서를 위시해 최복섭(崔福燮), 나질정 송택규(宋澤圭), 배차정(裴次渟) 등이었다.

그들은 시위군중들에게 배부하기 위해 진내리의 박명서 집에서 국기를 만들었는데 거사를 이틀 앞둔 3월30일 오후 11시에 법성우편소의 창문에다 태극기 10여본을 던져 넣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단서가 생겨 확증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