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 이후 학교 비밀결사조직 결성

근현대사 조명 19 -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영광 출신 ①

2005-07-13     영광21
항일투쟁위해 분산된 조직 연합전선 구축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일어났던 한ㆍ일 학생간의 집단 충돌사건이 발단이 돼 광주학생뿐 아니라 전국 190여개교의 54,000여명의 남녀학도들이 시위운동을 전개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총궐기했던 민족해방운동으로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쌓이고 쌓인 민족적 울분을 전국적으로 폭발시킨 3ㆍ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기미독립운동 이후 '민족의 백년대계는 교육으로'라는 원대한 계획과 자각에서 급격히 고조되어간 교육열은 필연적으로 학생층의 급속한 성장을 초래하게 했다. 이리하여 학생은 점차 민족의 지성을 대표하는 계층으로 성장돼 가고 민족해방전선에서도 그 전위세력을 자임하게 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 발단이 단순한 한ㆍ일 학생간의 충돌사건에서 기인했지만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이 그 역사적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3ㆍ1운동은 목표로 했던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으나 민족의 정기를 내외에 선양했고, 그 정신은 꾸준히 계승돼 오래도록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이 됐다.

3ㆍ1운동 직후에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을 비롯해 만주, 노령 등지를 거점으로 하는 무장독립군의 무력항쟁, 왜정기관 및 일제요인에 대한 투탄저격을 통한 끊임없는 국내외 투쟁 등 민족의 맥박은 줄기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젊은 학도들의 가슴에는 민족적 의분이 용솟음쳤던 것이니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이와 같이 3ㆍ1운동 이후 줄기차게 계속된 항일 독립투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일제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민족차별, 그리고 노골화된 노예교육을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학생들의 대일감정은 날로 악화돼 가기만 했다. 더욱이 3ㆍ1운동과 6ㆍ10만세운동의 뼈아픈 체험을 통해 민족해방투쟁의 전위임을 자각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일제를 구축(驅逐)해야겠다는 결의를 굳혀갔다.

이리하여 6ㆍ10만세운동 이후 각급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비밀결사가 조직돼 갔으니 강력한 투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학생 비밀결사는 외부의 민족단체와 연결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1926년 7월이래 전국적으로 치열해진 항일 동맹휴학투쟁은 이 학생 비밀결사의 작용이 컸던 것이다. 학생 비밀결사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광주학생의 성진회(醒進會), 독서회, 소녀회 등이 있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후해서는 <학생전위동맹>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밀결사 성진회가 조직된 후부터 광주학생들의 배일감정은 더욱 고조되며 표면화돼 갔다. 그러나 이 성진회는 결사한 5개월만인 1927년 3월 정남균(鄭南均)의 집에서 회합했을 때 전략상 해산을 결의했다.

그 이유는 회원중의 채영석(蔡泳錫)이 광주경찰서에 근무중인 민완형사부장과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성진회의 기밀누설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해 그 후부터는 비밀보장을 위해 연합집회는 하지 않고 각 학교단위로 활동을 하기로 했다.

이와 같이 성진회는 표면상 해산되었으나 각 학교단위로 개별적인 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1929년 6월 중순경 다시 통일조직을 갖기에 이르렀다. 즉 이제까지의 활동이 분파적이요, 개별적이어서 전열이 분산됐기 때문에 다시금 강력한 연합전선을 구축해 투쟁전열을 정비·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 비밀결사가 곧 성진회를 이어받은 독서회이다.

1929년 6월 중순 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張載性)이 동교 재학생 김상환(金相奐) 김진섭(金晋燮) 윤창하(尹敞夏), 광주사범 재학생 송동식(宋東埴) 강달모(姜達模),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조길용(曺吉龍) 김순복(金順福) 등과 시내 양림리 김기권 집에서 회합해 <독서회중앙부>라는 새로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때의 부서와 임원은 ▶ 책임비서 : 장재성 ▶ 조사선전위원 : 김상환 김진섭 ▶ 조직교양위원 : 송동식 김순복 ▶ 출판위원 : 조길용 이신연 ▶ 재무위원 : 강달모 윤창하 등이다.
그리고 이 회원들은 매주 1회씩 회합해 각 학교에 중앙부와 동일한 체제의 결사를 조직하되 중앙부가 이를 통할 지도하기로 결의했는데 각 학교별 독서회의 조직경위는 다음과 같다.

◆ 광주고보 독서회
1929년 6월 하순경 장재성의 지도아래 김상환 김진섭 윤창하 김태원 오쾌일 등이 시내 서남리 최국문의 집에 모여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다음날 전기 7인 외에 김종섭 등 15인이 무등산에 회합해 "세계적으로 밀려오는 신사조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장재성의 강의를 듣고 광주고보 독서회를 조직했다.

◆ 광주농업학교 독서회
광주농업학교 독서회도 광주고보와 거의 같은 때인 1929년 6월 하순경 장재성의 지도하에 조길용 이익범 권수동 정해두 김복근 김종기 김문일 홍원표 정 욱 최정기 김남철 최차도 송두현 박종주 김현수 박석진 윤익하 등이 무등산에 모여 독서회를 조직했다.

그 내용을 보면 ▶ 재무위원 : 조길용 ▶ 조사부위원 : 이익범 권수동 ▶ 조직교양부위원 : 김남철 정 욱 최정기 김순복 그리고 전회원을 4개반으로 나누어 조길용 이익범 정 욱 김순복 등이 각반 책임자가 되어 교양과 지도를 담당하고 매월 수회씩 회합해 운동방안을 협의하기로 하고 각 학년별 독서회까지 조직돼 그 기세가 매우 왕성했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