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형태의 모임 결성해 지역운동

근현대사 조명 21 - 영광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단체 ①

2005-07-28     영광21
일제 탄압과 감시로 대부분 강제 해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영광에서 일제에 항거해 민족운동을 주도한 여러 단체가 있었으니 여기에 그 실태를 간추려 본다.

영광청년회
영광청년회는 1918년 창립해 영광읍 무령리 소재 현 영광우체국 뒤(구 한국시대의 사복청사)에 영광청년회관을 두고 3ㆍ1운동의 주역을 비롯해 영광유치원, 영광학원, 영광중학교기성회 등의 설립과 그 운영의 주역을 맡았다.

193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이 고장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온 강력한 단체로서 이 단체를 이끌어 온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초대회장 : 정인영(1918~1922) ▶ 2대회장 : 위계후(1922~1930) ▶ 3대회장 : 조주현(1391~1934) ▶ 임원 : 조규원 편진욱 정태희 조용남 서순채 김형모 유봉기 조영달

영광농민회
영광농민회는 1918년 창립한 단체로서 노동회 또는 소작인조합이라고도 했다. 이 조직은 농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농민들 속에 파고들어 민족사상을 고취시켰고, 앞장서 일제와 투쟁한 단체로서 3ㆍ1운동의 주역을 맡았다.

특히 영광중학교 기성회에 참여해 설립기금 40만원 중 17만원을 갹출해 내는데 크게 기여한 강력하고 광범위한 조직으로 일제의 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아온 유일한 농민운동의 모체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회장 : 김은환 ▶ 임원 : 정인영 박정순 조용남(서기) 서순채 김철주

영광상우회
영광상우회는 1924년 창립된 이 고장 유일의 상공인 단체로서 1910년 이후 왜인들에게 빼앗긴 상권을 되찾기 위해 상공인들을 계도해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한 조직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한 바가 컸다. ▶ 초대회장 : 정동희 ▶ 2대회장 : 정동석

추인회
3ㆍ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지하운동으로 그 양상과 방법이 바뀌어, 민족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문맹퇴치, 물산장려, 왜화배척 운동이 전개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회관과 학관이 건립되고 야학, 강연 등 계몽운동이 치열하던 무렵인 1922년 10월 추인회(秋蚓會)가 창립했다.

주된 목적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문맹퇴치의 일환으로 한글보급에 주력하고, 조상전래의 시조창법을 보급시킴으로써 숭고한 민족의 얼을 되새겨 주는데 있었다. 당시 왜경들은 사상감시와 집회의 감시에는 혈안이 돼 있던 때라 겉으로는 시조만 읊는 한인한상(閑人閑想)의 교류라 인식시키며, 안으로는 민족정신의 함양과 민족단합운동을 열심히 전개해 나갔다.

당시 추인회는 3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시조창에는 신명희가 주동이 되고 문예활동은 조주현이 주관했는데 여기서 한국 최초로 신재효의 여섯바탕 판소리 소개와 법성12경을 개벽지에 발표했다.

'에쓰페란토'의 보급을 위해 서울에서 신봉조, 최경식 선생을 초빙해 강습회를 갖는가 하면 회원들은 각자의 창작시조를 매월 1회씩 의무적으로 발표해야만 했다. 여기서 당시의 추인회가 널리 보급시켰던 시조론을 살펴보면, 시조에는 본래 경제, 완제가 있고, 장단은 3ㆍ5박(拍=點)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추인회는 30여명의 회원이 매월 1회씩 의무적으로 창작한 시조를 발표하여 등사판이지만 소품집도 2회에 걸쳐 발행하는 등 그 활동이 활발했으나 왜경들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경향각지에서 많은 인사들이 영광을 찾아와 조주현, 신명희 등과 함께 시조를 논하고 또는 읊었다 한다. 특히 가람 이병기 선생의 내왕이 잦았으며, 그러던 어느 초여름 이병기, 조희충, 조주현, 신명희 씨 등 네사람이 전라북도 부안, 변산의 대교목에 있는 매창의 고총 성묘를 마지막으로 왜경들의 끈질긴 탄압에 의해 추인회의 문은 아주 닫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추인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회장 : 조주현 ▶ 총무 : 신명희 ▶ 회원 : 조희충 조규원 조륭현 조용남 서순채 남궁현 김철주 김우길 이대우 허 정 조상하 조종민 김길성 외 15명이였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