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체육단 날조사건 3·1운동후 최대 옥사
근현대사 조명 22 - 영광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단체 ②
2005-08-04 영광21
영광식산조합
1927년에 창립한 조합으로서 1924년의 한해로 연이은 대흉년이 계속돼 기아상태에서 헤매는 농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항구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수리시설과 농지를 확장하고 축산을 장려했으며 간척사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속에 파고들어 민족의 앞날을 같이 고민했다. 또 식산조합은 농민회와 청년회 등과 제휴해 외화배척, 자립경제, 문맹퇴치의 3대운동을 전개해 민족자각을 촉구한 농민을 위한 경제단체로서 농촌개발에 공헌한 바 컸다.
▶ 회장 : 정인수 ▶ 임원 : 이 인 박장업
갑술구락부
1934년(甲戌年) 2월 비밀결사한 갑술구락부는 유사시(독립운동을 말함)에는 핵심이 돼야 한다는 묵계 아래 발족한 영광 유일의 독서회였다.
▶ 회장 :조주현 ▶ 회원 : 정동석 조희태 이 숙 정 욱 박연근 조장현 외 8명
영광여성동맹
1935년 발족한 이 고장 유일의 여성단체로서 항일투쟁의 일익을 담당해 여성들의 민족적 자각에 크게 기여했던 단체이다.
▶ 회장 : 노함풍(조주현의 부인) ▶ 임원 : 박계순(남궁현의 부인) 박귀순(조희태의 부인) 정금주(조규조의 부인) 외 6명
소인극회
1935년 발족한 단체로 무대연극을 통해 민중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재향 지식인과 유학생들이 참여해 창립한 극회다. 소인극회의 제1회 공연은 유치진 작 <당나귀>를 극화 공연해 많은 박수와 호응을 받았고, 제2회 공연은 <봉화>라는 작품을 공연키로 하고 연습중에 왜경들의 제지로 말미암아 공연하지 못하고 1936년 9월 강제 해산당했다.(<봉화>의 줄거리 : 고려가 망한 후 살아 남은 충신들이 고려 재건을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하는 상황을 표현한 작품이다)
▶ 회장 : 정 욱 ▶ 임원 : 김동설 정태송 조영흔 유갑기 외 20여명
영광체육단
일제의 탄압과 강권으로 영광에 있어서 민족운동을 주도해 온 청년회와 농민회 등이 해산 당하자 어떠한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조직의 구성을 꾀하고 있던 때에 당시 서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현암 이을호가 서울에 보급된 덴마크의 <닐슨북>이라는 도수체조를 배워 가지고 귀향해 영광읍 도동리 소재 진명사 마당에서 영광의 지성인들을 모아놓고 매일 아침 이 도수체조를 가르쳤다.
이때 조기체조를 빙자해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이게 된 이 고장의 지도층 인사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1934년 4월 영광읍 교촌리 소재 명륜당에 모여 거군적인 조직으로 영광체육단을 창단했다.
이 체육단의 활동은 비단 영광에서만 그치지 않고 체력향상이라는 표면상의 슬로건을 내걸고 영광 장성 고창 정읍 등 4개군을 묶었다. 이어 4군 연합운동회를 영광에서 시작해 4개군을 순방하면서 연차적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1935년 4월 제1회 연합운동회를 영광에서 개최했었는데 그 성과가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1937년 4월 개최한 영광시민운동회에는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해 손기정 선수와 함께 대한 남아의 위력을 과시한 전남출신의 남승룡 선수를 초빙, 영광시민운동회를 더욱 의의깊게 치뤘을 뿐만 아니라 나라없는 서러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서로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다.
그후 체육단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날이 갈수록 배일사상이 고조돼 가는 상황을 일본경찰이 그대로 묵과할 리 없었으니 이때부터 왜경들은 면밀한 계획을 짜고 1919년 이후 영광에 있어서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여기에 참여한 지도층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이 기회에 영광의 민족사상을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작정하고 1937년 9월16일 밤 '동방약소민족옹호' '대한독립만세'라 쓰인 벽보를 왜경 자신들의 손으로 조작해 영광읍 사거리 전주에다 부쳤다.
이후 왜경은 범인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영광의 지도층 인사 300여명을 1937년 9월19일 일제히 검거해 영광경찰서 유치장과 공회당(무도장), 그리고 각 면 지서 유치장 등에 분할 수감해 놓고 당시 전남도경찰부의 악명높은 고등계(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을 전담한 기구)의 원흉인 노주봉 경부의 진두지휘하에 1938년 4월12일까지 무려 7개월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가해 허위자백을 받은 후 사건을 날조했다.
결국 왜경은 1938년 4월13일 해인 위계후 선생 외 44명의 애국지사들을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목포검찰청으로 송치해 위계후 조주현 남궁현 나질순 등 4인만 실형을 받고 나머지 41명은 1939년 2월8일 무려 18개월만에 예심면소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영광에 있어 3ㆍ1운동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옥사가 바로 체육단 사건으로 출감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을 병원에서 보냈거나 결국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뜬 분들이 많았다.
애석하게도 이때 옥고를 치룬 분들의 정확한 재판기록을 입수하지 못해서 여기에 기록하지 못했음을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면서 당시 체육단의 임원진 명단만을 기록한다.
▶ 단장 : 위계후 ▶ 부단장 : 조규원 ▶ 총무 : 조주현 ▶ 재무 : 서순채 ▶ 운영위원 : 조주현 서순채 정진삼 박연근 조장현 김맹규 정 욱 이을호 허 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