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광흥학교 영광학원 등 근대교육 산실

근현대사 조명 23 - 영광 교육의 발자취 ①

2005-08-11     영광21
일제치하 고등교육 목적 중학교 기성회 설립
영광은 옛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어염시초가 풍족한 고을로서 민심 또한 순후해 북으로는 안악(安岳)이요, 남으로는 영광(靈光)이라는 '옥당골'로도 그 이름이 알려진 고장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처럼 자원이 풍부한 천연의 혜택에 젖어온 탓인지 고을 백성들의 기질과 일반 인심은 연약부허(軟弱浮虛)한 경향이 있어 전남도 차원에서도 항상 열세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제반의 발전면에 있어서도 낙후된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고장 교육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남겨주어야 할 것인가를 돌이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영광의 향교
영광향교는 고려 공민왕(1351~1374)때에 창건돼 조선 선조 15년(1582년)에 본관만을 중창해 600여년을 내려오면서 이 고장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관립(官立)교육기관으로서 고려조때는 눈에 띄게 발전을 못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향교 발전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전국의 각 부, 군, 현에 모두 향교가 설립되고 성균관과 같이 문묘기능(文廟機能)과 유생들의 한문교육은 물론 향풍순화(鄕風醇化) 등 사회교육적인 기능도 겸해 갖게 했었다. 입학자격은 양반의 자제로서 16세 이상을 원칙으로 하고 정원은 부(府) 대도호부목(大都護府牧)의 향교는 각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이 50명, 현은 30명이었다.

향교의 감독권은 관찰사와 수령에게 주어졌으나 선조 19년(1586년)부터는 중앙정부가 제독관제도를 둬 전국 각도에 파견해 독학케 하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조선 중기이후 서원의 발흥으로 향교는 점차 쇠퇴해 갑오경장전까지는 문묘제형(文廟祭亨)에만 그치는 것으로써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다 고종 31년(1834년) 과거제도의 폐지로 사실상 과거의 준비장이었던 향교는 더욱 존재가치를 상실해 문묘배형의 임무에만 그쳤다.

그후 일제의 침략으로 전국이 소란한 가운데 1908년에는 영광의 뜻있는 지성들이 사재를 들여 향교 명륜당에 보통학교 과정인 광흥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로 하여금 신문화에 접하게 하는 등 신시대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술국치가 발생한 1910년 직후 일제는 개교 3년째인 광흥학교를 폐교 조치하고 그 자리에 영광보통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19년 보통학교 훈도와 학생들이 3ㆍ1독립운동에 앞장서 총궐기하자 당황한 일제는 1920년 4월 전격적으로 보통학교를 조선조 때의 객사였던 현 영광초등학교로 이설(경찰서 앞이라 감시하기가 용이한 위치이기 때문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1년 3월에는 영광청년회가 주축이 돼 명륜당에다 영광학원을 설립해 4년제의 보통학교 과정 남녀 120명과 속성과(1년제) 30명을 모집 수용하고 운영하던 중 영광에 정규 중학교(고등보통학교·5년제)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군민의 뜻에 의해 1922년 10월 명륜당 영광학원내에 영광중학교 기성회를 설립하고 범군민운동으로 중학교 기성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곳도 바로 향교의 명륜당으로서 향교는 영광군민에게 있어 소중한 역사의 산실로서 귀중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영광의 서원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부터 선현존경과 후진장학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인의 사학기구로서 명유(名儒)공신을 숭배하고 선현과 선사(先師)를 봉사하는 사우(祠宇)이며 한편으로는 유생을 모아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학숙이기도 했다.

서원의 교육과목은 소학을 비롯한 사학(대학 논어 맹자 중용)과 오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그리고 심경(心經), 근사록(近史錄), 성리학(性理學), 가례(家禮), 제사집(諸史集), 사장(詞章) 등이었다.

성균관이나 향교에 비해 다른 점은 첫째, 까다로운 학령(學令)이나 학칙의 구속을 벗어나 산수좋은 한적한 곳에서 자유롭게 수양과 사색을 할 수 있었다.

둘째,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사성십철(四聖十哲), 육현(六賢)과 문묘배형 등 복잡성을 면치 못하는 반면, 서원에서는 특정한 명유나 공신을 직접 사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 폐단을 들면 서원이 점차 특권화되고 붕당화 했으며 나아가서는 국가발전에 암적인 존재가 돼 갔다.

이 고장 영광에도 묘장서원(1616년 건립), 무령서원(1748년 건립), 내산서원(인조때 건립), 계송서원 등 4개소의 서원과 향사(鄕祠)로는 남강사(南岡祠)를 비롯한 12개소의 사당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훼 이후에는 매년 정한 날자에 제사만 지내는 것으로서 명맥만을 유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광의 각 서당
서당은 사학(四學)이나 향교 등에 입학할 준비교육장으로 사숙(私塾), 학당(學堂), 학방(學房)이라고도 칭해 지금도 산간벽촌이나 일반 읍면에 자녀들에게 한문과 습자를 가르치기 위해 희소하나마 계속 존립하고 있다.

영광에도 각 마을에 수많은 서당이 산재하고 있었으나 영광읍 남천리(현 삼화여관 터)에 있던 관(官) 서당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1906년까지 훈장 황오수에 의해 운영됐었다. 그러다 일제의 침략이 시작돼 전국에 항일의병항쟁이 일어나 관 서당의 학도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층은 구국을 외치며 의병에 참가하는 등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서당을 비롯한 모든 서당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일학원
1907년 영광읍에 거주하는 박동규가 서울에 다녀와서 신문화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시 영광읍 도동리에 있던 노인당(그후 오성병원터) 자리에 한일학원을 세우고 영광우체국에 근무하는 일본어 통역관 박영남을 선생으로 초빙해 약 6개월동안 운영했으나 하필이면 왜놈들의 말을 배울 필요가 어데 있느냐는 뜻있는 우국지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문을 닫았다.

광흥학교
1908년 조찬승, 편용무 등 영광의 중견 인사들이 뜻을 모아 관서당, 노인당, 향교서당 등의 재산을 처분해서 마련된 자금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광흥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에 편용무가 취임했다.

이후 약 2년간 운영해오던 중 1910년 한일합방의 비통속에 학생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거의 날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한일합당 반대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니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보아온 일제는 개교 2년만에 폐교조치하고 말았다.

당시 광흥학교의 학제는 1년간의 숙성과정으로서 제1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했는데 그 면모를 보면 정인영 김은환 조희충 조병모 이 인 조융현 박동규 정동립 김창섭 정관철 외 2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