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인 관심 모은 영광중 설립 추진
근현대사 조명 25 - 영광교육의 발자취 ③ - 영광학원과 영광중학교 기성회
2005-08-25 영광21
3ㆍ1운동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은 어쩔 수 없이 지하운동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는데 이 무렵 일제는 한민족을 무단정치로 계속 강압하면 3ㆍ1운동과 같은 거센 민족봉기가 재발할 것을 우려해 회유책으로 형식적인 문화정책을 내세웠다.
민족지도자들은 때를 놓칠세라 이를 역이용했으니 이 기회에 독립을 위한 민족역량의 배양에 진력할 때라 판단하고 겉으로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순응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교육 문화 경제 종교 등 각 방면으로 손을 뻗쳐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고장 영광에서는 1922년 2월 위계후 선생을 주축으로 영광청년회 임원 10여명이 중심이 돼 영광읍 교촌리 소재 명륜당에 사립 영광학원을 설립해 보통과(4년제) 남녀 각 60명과 속성과(1년제) 30명 등 150명을 모집 수용했다.
교사진으로는 초대교장에 조병모, 2대 교장에 위계후, 교사로는 조주현(국어·국사담당), 김형모(수학담당), 조융현(한문담당), 박화성(여자반담당) 등 제씨를 초빙해 운영하던 중 영광에 정규중학교(5년제, 당시에는 고등보통학교라고도 했다)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2년 10월 청년회의 임원 유희중 조희충 정인영 위계후 조규원 이 인 김은환 정태희 조주현 조용남 서순채 김형모 조영달 등 제씨가 주축이 돼 영광중학교 기성회를 창립함과 동시에 상기 인사들로 하여금 기성회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조희경, 부위원장에 정동명을 추대해 중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1923년 1학급 60명 모집
이후 영광군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찬동에 힘입어 1922년 11월30일 자기 재산의 십분의 일을 내놓기로 승낙한 사람의 수가 수백명에 달해 사업이 순조롭게 진척돼 1923년 1월30일 개최된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동년 4월1일부터 중학교 1학년 1학급 60명을 모집해 영광학원에 임시 수용할 것을 결의했다.
기성회의 고문으로 추대했던 영광군수 이사필을 비롯한 조희경 정동명 조병우 조병모 이 인 정인영 조두현 등 제씨를 도청 교섭위원으로 선정해 도지사와의 교섭을 하게 하는 한편 1923년 2월25일에는 영광중학교(5년제) 1학년 학생 60명의 모집공고를 내고
한편으로는 위계후가 서울로 올라가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의 추천을 받아 유종열(서울 출신) 양주훈(평양 숭실대 출신) 조종환(수원고등농림 출신) 송재철(수원고등농림 출신) 조진구(서울 연희전문 출신) 등 우수한 교사진을 초빙해 1923년 4월1일 드디어 영광군민이 갈망하던 영광중학교의 문이 열렸다.
이 때 기성회의 임원들이 불철주야 열심히 추진한 보람이 있어 중학교 설립기금의 목표액 40만원(정조 4만석) 중 17만원이 거출됐다. 이 금액은 오로지 중산층과 세산자(細産者)들이 솔선해 납부한 금액이었다. 서울에서는 당시 교육계와 언론계의 명사 15인으로 구성한 <영광중학교 기성회 후원회>를 조직해 백방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서도 기성회 후원회 조직돼
서울에서 조직된 후원회 위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회장에 유성준, 위원에는 엄주익 장두현 김성수 허 헌 정대현 이종린 현상윤 최규동 김철수 강 매 임성재 남궁훈 이광종 송진우씨 등 한국의 거성들이었다(1923년 12월6일 조직).
이어서 1923년 12월9일 기성회의 업무를 쇄신하기 위해 영광청년회관에서 개최한 군민대회에는 각면 면장과 읍·면의 유지 약 400명이 모여 대회를 진행됐는데 이는 군민 일반의 교육열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나타낸 결과라고 하겠다.
이날 회의에서는 대폭적인 임원개편이 단행됐으니 기성회 창립이래 참여해 온 임원중에는 상신고투하는 동안 개인의 경제적 희생의 과대함과 육신상의 득병자 또한 속출해 부득이 휴양이라는 명분으로 실제 노력하던 위원은 전부 사임하고 새로운 위원을 선임했다.
새로운 임원진을 보면 위원장에 조희경(유임), 총무 조설현 정태희 박정환 이사 정동윤 지용회 노정섭 허진경 서의려 이용호 김종우 이문봉 박인환 배승순, 감사 조병모 정인수 조희석 등 제씨들인 바 이들은 당시 영광에 있어 토호들로서 이름난 분들이다.
특히 이날의 군민대회에는 서울에서 영광중학교 기성회 후원회장인 유성준씨가 참석해 열렬한 강연이 있어 이 대회에 참석한 영광군민들의 감격과 각오를 새롭게 한 바 있다.
기성회 해체후 전국에서 분노 질책
이렇듯 중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무렵 모체인 영광학원에서는 위계후 조주현 김형모 박화성 등이 중심이 돼 뜻있는 지성인들을 규합해 <자유예원(自由藝苑)>이라는 향토문예지를 발간해 이 고장 문화향상에 기여하면서 민족정신운동을 확산시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괄목할 사실은 회원들이 투고한 창작을 월요일과 금요일 주 2회에 걸쳐 심사해 장원으로 선정된 작품은 서울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부인(婦人)>이라는 월간지에 발표되는 특전이 부여되는 등 이 무렵이 영광에 있어 문예활동의 정점을 이룬 때라 하겠다.
특히 조주현 김형모 박화성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조주현의 시재(詩才)는 한국문단에서도 추종을 불허하리만치 독특하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었으며, 김형모 또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글솜씨가 대단한 것이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두분은 애석하게도 일찍이 4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 보건데 영광중학교 기성회의 사업이 시작된 동기와 그 목적은 오로지 민족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설정된 철저한 민족운동의 일환이라 볼 때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착수한지 겨우 3년만인 1925년 3월에 이르러 일부 부호층의 비협조와 그들간의 불화로 인해 기성회의 기능을 잃고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영광군민 뿐만 아니라 전국의 뜻있는 인사들의 분노와 질책은 유례없는 것으로서 8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분노와 아쉬움이 가시질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동아일보 1923년 3월11일자 사설, 12월8일자 기사, 12월9일자 사설, 12월13일자 기사, 1925년 2월15일자 기사, 12월27일자 기사 참조, 박화성 여사, 조두현옹, 조태현옹, 정태일 씨의 증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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