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 선생과 선비한복
유학뿐 아니라 한복 제조 방법도 전수
수은 강항(1567∼1618년) 선생은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박사공 강계용 선생을 시조로 14세손이며 사숙재 강희맹 선생의 5대손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3세부터 맏형인 저어당 해(저어당 : 이이 율곡선생 문하)로부터 사서오경을 배우고 익혀 7세에 맹자정비 일화와 8세에 강목촌 일화를 드높일 정도로 총명했다.
벼슬길에 올라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광읍 임진수성사에서 의병장으로도 활동했다.
이어 1597년 정유재란이 다시 발발하자 왜의 수군이 한산도를 거쳐 서해로 물밀 듯 들이 닥쳐 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두 형(준과 환)과 함께 왜군에 피랍됐다.
선생은 일본에서 시코쿠 지방의 오즈大津성에 약 1년, 교토의 후시미伏見성에 약 1년8개월 머물게 된다.
이 포로 길을 우리는 후계세대가 한 맺힌 역사의 현장을 잊지 않도록 강항로드(ROAD)길로 개발하고 ‘강항문화제’에서 체험학습에 활용하기로 계획하고 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왜국의 학승學僧 순수좌(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는 당시 조선에서 국가의 통치, 지배, 경영이념이자 최고의 선비문화로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음을 몹시 동경하며 이러한 경지에 오른 조선의 유교에 갈망했다.
때마침 지성至聖의 반열에 오른 수은 강항 선생을 만나자마자 필담筆談을 통해 고매한 학덕을 지닌 선비임을 순식간에 알아보고서 읍소하며 간절히 사제지간의 연을 청했다.
이에 선생이 깊은 고민 끝에 허락을 해 제자로서 예법을 갖추고 사서오경과 조선의 유학 이론과 과거제도, 상례 등을 배웠고, 일본에서 유학뿐 아니라 그가 동경하는 심의深衣 선비한복을 한땀 한땀 짓는 방법까지도 터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심의인 선비한복을 후계세대에 도입해 의복을 단정히 착용함으로써 자세가 달라지고 인성교육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국제 선비한복모델 선발대회를 개최해 한·일간의 역사, 문화교류에 적극 앞장서고자 하는 것이다.
수은 강항 선생은 왜국에 억류되어서도 사서오경을 발문했고,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등 16종 21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가 일본 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소장돼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일본인들은 일본 근대화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으며 지난 2019년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실관계를 확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