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진 선생, 학교 문전에 내걸린 일장기 찢는 배일사상

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④

2005-10-27     영광21
이 글은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學校史) 뿐만 아니라 법성향토사 전체를 공론화하기 위해 보다 정확한 향토사를 기록하기 위한 On-Line 계획의 일환으로 시도된 글이다. 글에 미흡한 부분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 보완이 필요한 부분과 반론 등은 이 글을 읽는 이 누구나 개진하실 수 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학교사의 기록에 소중한 사료나 문헌이 있으신 분은 학교 또는 운영위원회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
개교 100주년을 즈음해 학교 운영위원회(위원장 정명수)는 법경헌에 자료를 의뢰, 기록을 정리해서 게재하게 됐다. / 편집자 주

고경진 선생과 법성사립보통학교

당시 법성사립보통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은 <법포견문기>에서 '어느 날 밤에 학교를 갔더니 웬일인지 서편 방에 고경진,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외 여러 사람이 무언가 소곤거리더니 나중에는 고 선생이 책상을 치며 통곡을 했다.

나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슨 사유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만 생각하였다. 그후 몇일 후에 우연히 고경진 선생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학교(주 : 청년터에 위치했던 법성관립보통학교) 문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되어 서 있었다.

이것을 본 고 선생은 한동안 말을 못하더니, 일장기를 떼어들고 찢으려다가 잘 안 찢어지자 발로 딛고 찢어 내던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일본사람들은 아연실색하였고,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고 선생은 산으로 도주하였고, 일본사람들은 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깊은 의미를 몰랐다'라고 이 분들의 배일 활동상을 소개하셨다. <법성향지>의 기록으로는 고경진 선생의 나이 24세 되시던 1911년, 법성포에 도장관(도지사)의 시찰이 있을 때의 일로 기록돼 있다.

일장기 찢어 모진 고문당해

그리고 이 일로 고경진 선생은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타의에 의해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교단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교단을 떠나며 한편의 시를 남겼는데, 후에 이 시에 곡을 붙여 부르니 이것이 법성 사람들의 애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1절 : 슬프도다 우리민족은 4천만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福樂)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이 왠 말인가? (후렴)철사(鐵絲) 주사(蛛絲)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레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動)켔네. 일간초목(一竿草木)도 나의 것이오, 삼천리 강산도 내것이로다.

2절 :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 전에 꿈틀거리고, 작은 벌도 제 몸 다치면 반드시 한번은 쏘고 죽는다.(후렴)』

또한 신명희 선생의 <법포견문기>에는 고경진 선생의 일대기가 수록돼 있는데 그의 투철한 배일사상과 철저한 독립운동정신을 엿볼 수 있어 중복을 피하여 다음과 같이 옮겼다.

고송( 松) 고경진(高暻鎭)(덕진;德鎭)(1889∼1942) : 선생은 법성면 진내리 362번지에서 파총(把摠)(각 군영의 종4품 벼슬) 고시은의 아들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과묵하였으며, 개성이 투철하였다. 남다르게 글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경서를 읽어 군자의 도를 지키었다.

(중략)법성사립보통학교 최한주 교장의 인도로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학원에서 수학했다. 1913년 고향에 돌아와 법성사립보통학교 교단에 서게 되었다. 선생은 배일사상과 독립운동 정신교육에 철저하였고 민중운동의 궐기에 전력하였다.

1919년 기미 3·1운동이 발발하자 영광의 위계후 선생과 손을 잡고 법성 만세시위를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하자 그의 항일투쟁은 노골적으로 알려져 일본 경찰의 감시는 물론 투옥하는 등 심한 탄압을 받게 되어 (중략)1920년에 학교를 떠나 해삼위와 북만주를 중심으로 투쟁하다가 군자금 모금차 몇 차례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해삼위파, 북만주파, 북경파, 상해파 등으로 분열되는 것에 가슴을 치고 일시 귀국하였다.

고경진 모든 것 버릴 줄 안 사람

선생은 "애국이란 나라와 동포를 위하여 자기를 버려야 하고, 돈보다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교육과 항일운동에 투신한 후부터 가사를 돌보지 않고 전 정력을 구국에 집중하였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극도의 빈곤에 빠지게 되었고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몸 부칠 곳조차 없게 되어 1936년경부터 불갑면 녹산리로 가족들을 집합하게 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출입이 어렵게되자 가족들은 그를 잊어야 했고, 그 역시 가사는 물론 처자까지 머리에서 지워버려야 할 아픔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선생이 지치고 지친 병든 몸으로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기 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가 되어 자기 집이 토담집인지, 자기 부인이 얼마나 늙었는지, 아들이 얼마나 장성하였는지 조차도 모른 채 1942년 5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의 호(號)는 고송( 松)이며 관(貫)은 고흥이다.』

고경진 선생의 호가 문적에는 야인(野人)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에는 고송으로 기록되어 있고, 얼마전 전영광문화원장을 역임하신 조남식 선생도 고경진 선생의 본관을 고흥으로 잘못 기고하셨는데 아마 신명희 선생의 <법호견문기>에서 잘못 인용하신 듯 하다. 고경진 선생의 본관은 고흥이 아니고 장흥임도 아울러 알려 드린다.
법경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