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여 동학농민군 영광읍성 점령할 정도로 세력 강성
농민혁명 이전에도 군수 횡포로 영광읍민 봉기 … 일본군, 영광읍 신하리에서 농민군 수백명 몰살
■ 5월11일 국가기념일 맞은 영광지역 동학농민혁명 ①
5월11일 제130주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즈음해 혁명의 발원지이며 역사의 획을 그었던 전북 고창군과 정읍시에서 농민혁명 기념행사가 연이어 열린다. 하물며 인근 광주시에서도 농민혁명을 기념해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어느 단체에서는 이름 있던 의열 뿐 아니라 이름 없이 산화했던 많은 농민군들을 위한 ‘무명 농민군’ 추모행사도 병행하고 있다.
녹두대장 전봉준이 혁명을 봉기한 전북 고부군은 고려 충렬왕 때 잠시 영광군에 병합된 역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지만 1914년 다른 군면 통합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면 영광군은 조용하다. 동학농민혁명과 연관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몰라서이다.
본지는 동학농민혁명 제130주년을 맞아 2005년 영광지역 근현대사 조명 첫 번째 시리즈로 연재했던 당시 영광문화원 조남식 전 원장의 <동학농민운동과 영광>을 통해 영광지역에서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을 다시금 살펴본다.
20여년 동안 꿈쩍하지 않고 있는 역사 재조명과 부활, 선양사업을 통해 군민들의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 편집자 주
영광에서의 동학농민운동이야말로 조정에서 외세(청)를 불러들여 진압하고자 했던 것이 일본이 개입되고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승전으로 우리나라 운명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화로 귀결됐다.
이 같은 치욕의 역사 교훈을 얻게 된 것도 우리고장에서 원인이 됐다는 것을 우리는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종 31년 1894년에 이 나라에는 혁명적인 대동학농민운동이 터지고 말았다. 세기世紀를 통해 양반지배계급의 폭정아래 억압당하고 착취당해 온 농민대중이 인내천人乃天의 자유, 평등사상을 외치고 용감하게 일어선 근대 민족종교의 동학교문東學敎門과 연결 협동하게 되므로 과거와 같은 한 지방 탐관오리를 상대로 하는 민요民擾, 민란 형태가 아니라 보국안민의 큰 기치아래 사회제도와 국가정치의 대개혁을 기도한 대담한 농민전쟁이었다. 이로 인해 5백년 왕조와 그들의 척족정권戚族政權을 뿌리채 잡아 흔들어 놓았다. 나아가 그들은 대외관계는 척왜 척양을 주장했다.
제도 국가 대개혁 기도한 농민전쟁
근대 내슈널리즘의 기치도 뚜렷이 내세우게 된 갑오동학혁명을 계기로 해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비겁한 척족세도가 차병대초借兵代剿라는 명목아래 청병을 도입함으로 10년 이래 양병養兵하고 대기해 온 신흥제국주의 일제에게 전쟁도발의 좋은 구실을 던져줘 청일전쟁이라는 국제전쟁까지 야기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갑오동학혁명은 실로 근세왕조 건국이래의 최대사건으로 대내에서는 타율적인 근대화의 미완성 과정속에 왕조자체의 붕괴를 촉진했고 대외에서는 동양 국제사회의 중대변국重大變局을 초래해 그 역사적 의의가 비상한 바 있었다.
당시 동학혁명은 동학농민의 봉기요, 또한 우리 역사상 최대 최초의 민간혁명이었다. 동학군의 봉기는 대원군의 실각 이후 민씨 정권의 정치적 부패와 지방관의 가렴주구, 외국 상인의 침투로 농민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1888~1889년의 전라도의 대 한발은 이 지방의 농민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거기다 삼남지방에서는 집단적인 화적의 횡행, 민란의 재연이 있었고 그러한 중에서도 전라도 지방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었다. 그러므로 동학군의 봉기가 전라도에서 발단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지리적 여건에서 기인한 수탈 가혹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는 반봉건투쟁으로써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으며, 2차 봉기는 순전한 항일투쟁이었다. 개항을 전후해 유생들 사이에 싹텄던 위기의식은 옛 군인들의 반발을 거쳐서 동학군의 봉기에 이르는 사이에 민중의 개혁사상으로 그리고 민족의식으로 전개됐던 것이다.
관리의 탐학과 일본 상인의 함부로 날뜀이 가장 심했던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군이 정부에 대해 요구한 것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일본상인의 축출이었다. 특히 미곡의 유출과 이에 따른 일본 상인들에 의한 상권 침해에 대한 금단을 요구하는 조항들이었다.
당시 영광군 염소(현 염산면 야월리) 포구는 원근 각지에서 수출되는 미곡 양만도 적지 않았고 법성포가 봉세조창이어서 세미전운稅米轉運 상 중요한 고장이었는데 관리의 탐학과 일본 상인의 미곡 수출무역 등 수탈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같이 이곳 농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기 때문에 동학군의 개혁요구 투쟁에 이곳 농민들이 많이 가세해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앞장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1894년 무장에서 영광 진격한 혁명군
당시 동학농민의 봉기가 이곳 영광까지 확산되고 동학혁명의 진로지역이며 동학농민군의 주요 봉기지라고 기록된(한국현대사 1권, 한국사(현대편), 대한국사 7권, 동학사 참조) 것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농민혁명 발생전 1894년 당시 영광군수는 민영수였다. 영광군수 민영수가 당시 영광 군민들에게 어떠한 횡포를 저질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의 횡포는 급기야 영광군민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2월28일 영광군민들은 민영수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김국현을 장두로 폐막을 바로잡기 위해 죽창을 들고 관아를 습격했다. 그리고 군교를 죽이고 영광군수 민영수를 위협했다. 그러나 영광군민들은 군수 민영수의 목숨까지는 거두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1894년 음력 4월12일(양력 5월16일) 정오 동학농민군은 무장에서 영광읍에 진격하여 오니 ‘영광군수 민영수는 양곡을 싣고 승선해 칠선바다로 피신해 버렸고 동학농민군은 영광읍성 안에 집결 주둔했으며 군기, 화약 등을 모두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기고 성문이 굳게 닫혀 출입할 수가 없었다’고 전라감사 김문현은 서울로 전보를 쳤었다. 그후 10월6일에 관헌의 무기를 빼앗겼다는 죄로 민영수 군수는 체포돼 서울로 압송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일 동학농민군 1만여명이 영광읍성 안에 진입해 성안의 거민(居民 : 그 땅에 사는 백성)이 환산(渙散 : 백성들이 해산해 흩어짐)돼 초멸무책(剿滅無策 : 동학농민군을 쳐서 무찌를 계책이 없음) 황민(惶悶 : 황송하고 두렵고 민망하고 속 답답할 괴로움)하기 이를 길 없다고 전라감사 김문현은 또 서울로 전보를 쳤었다.
진격 3일만에 백수 법성포 농민군
14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동학농민군 수만명이 법성포 인의산과 백수읍 구수산 앞뒤 여러 마을에 유진(留陣 : 행군 도중에 잠시 군사를 머물러 둠), 창도방포槍刀放砲로 한선漢船에 난입해 선판船板을 부수고 사격(沙格 : 사공)이나 일본인을 만나면 그대로 구타했다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은 서울로 전보를 쳤고 또 다음과 같이 전문보고를 서울로 쳤다. ‘동학농민군 1만여명이 영광군에 둔취(屯聚 :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음)해 5리씩에 복병을 두고 30리에 2,500명씩 그 세가 아주 넓고 커 날로 더하여 몇 천명인지를 알 수 없다. 사방에서 따라 모여들며 각처에 오가는 서자書字 연락이 번개와도 같이 빠르다’고 했었다.
이 같은 전문보고를 접한 서울에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 포도청 장교의 정탐을 지시했는데 이도 역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학군 통문 “민폐근본은 이포”
‘영광에 둔취한 동학농민군은 매일 진법을 조련하고 매일 밤에 경문經文을 송독誦讀하는데 5~6,000명 가량씩이고 영광, 무장 등지에 가장 많다고 했고 영광일대를 휩쓴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했었다’고 한다.
법성포 이향吏鄕에는 이미 4월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동학군 통문이 날아들었었다. ‘민폐의 근본은 이포吏逋에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탐관으로 말미암음이요, 그것은 또 집권자의 탐람이 근본이다. 이吏와 민民은 다름이 없어 이吏 역시 민民임에 틀림없으니 공문부상公文簿上)의 이포는 모두 보고하라’고 했었다.
동학군이 또 한편으로는 법성포 이향에 나붙었던 개혁조항이 처음에 권귀진멸權貴盡滅, 왜이축멸倭夷逐滅을 표방하고 내정(폐정) 개혁을 요구해 들고 일어났었다.
법성포, 농민군 활동에 세곡수송 마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내정개혁의 조목을 포고하기도 했던 동학통문은 ‘전운영轉運營이 이민에게 끼치는 폐弊, 균전관의 거폐생폐(폐해를 없애려다가 도리어 딴 폐해가 생김), 각 시정(市井 : 인가가 모인 곳 = 시가)에서의 분전수세(푼돈까지 거둬 들이는 세금), 각 포구에서의 선주船主의 늑탈(강탈 : 억지로 빼앗음), 타국잠상(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법령으로 금지된 물건을 몰래 파는 외국상인)의 준가무미(미곡값보다 무역 물건값이 더 높음), 염분鹽分의
시세市稅, 각종 물건의 도매취리(도매물건에도 이익을 많이 얻음), 백지징세(고지서없이 세금을 받음), 사전기진(거친 땅을 일구어 묵은 밭으로 만든 개인 소유의 밭땅), 와환(누어서 되돌려 받음)의 발본 등등 폐막(없애버리기 어려운 폐단)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릇 사농공상 사업四業의 민民은 동심, 협력해 위로 국가를 돕고 밑으로 빈사(죽음에 임박함)에 빠진 민생을 편안케 하는 것이 어찌 행幸이 아니겠는가’라고 법성포에 써 붙여 포고했던 것이다.
당시 법성포는 조창이어서 전라도 세곡을 나르기 위해 배의 출입이 잦은 고장이었는데 동학군들이 법성포에서 전운선을 몰아내 세곡의 수송이 두절될 지경이었다. 동학군이 영광을 점거하고 있을 때 경군(관군)을 군산포에 상륙시킨 전운선 한양호漢陽號가 세곡을 실으려고 법성포에 들어 왔을 때 50~60명의 동학군이 나타나 화승총 火繩銃, 창검, 죽창을 들고 전운선 한양호에 뛰어올라 전운국원 김용덕과 일본인 항해사 나가노 겐지로, 기관수 도쿠나가 센지로 등 5명을 새끼로 동여맸다. 농민군은 이들을 해안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끌고 가서 두들겨 눕혔다.
법성포구에서는 일본 상인이나 선박의 내왕이 잦았고, 일본에서 가져온 각종 잡화와 석유같은 것을 비싸게 팔고 한편으로는 쌀을 싸게 사서 실어 나르기에 바빴었다. 객주나 여각은 물화를 중개 알선해 주는 것이었다.
고종, 민폐시정 약속하며 해산요구
동학군은 이들 객주나 여각을 습격하니, 객주 주인은 일본 상인과 같이 도망하기도 했다. 정부는 또 정부대로 객주 한집에 대해 돈 100관문貫文씩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법성포 이향에 나붙었던 동학군의 폐정개혁 요구조항 안에는 이렇게 해서 전운영의 폐라든지, 타국잠상의 미곡 매출, 각종 물건의 도매취리 등의 폐지요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영광에서 나흘을 머무른 승승장구의 동학군 1만여명은 4월16일에는 3~4,000명이 영광에 머무르고 함평으로 6~7,000명이 남하했다. 4월21일 오전까지 영광에 체류하며 다음 작전에 대비하게 된 동학군은 깃대와 창검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위세를 올렸고 기마자騎馬者도 100여명에 이르러 그 중에는 갑옷을 입고 전립戰笠을 쓴 자도 섞여 있었다.
초토사 홍계훈은 당초 동학군을 추격할 생각을 못하고 정부에 전보를 쳐서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정부는 장위영 병정 300명과 강화병江華兵 500명을 원병으로 보내기로 했다. 4월19일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는 이들 관군을 거느리고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떠나 영광의 법성포로 향했다. 동학군이 영광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농민군 진압 현지 관군으로 어려워
초토사 홍계훈은 증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잔여군졸을 이끌고 전주를 떠나 영광에 왔던 것이다. 이미 동학군이 영광에서 함평으로 떠난 4월21일 오후에 홍 초토사 군대는 먼저 왔고 증원군은 4월23일 법성포에 상륙, 영광에서 합세됐다.
한편 정부는 민요의 책임자를 처벌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18일 사직처분을 당했고 4월19일 고종은 윤음(綸音 : 임금의 말씀)을 전라도민에게 내려서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선포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민론民論에 따라 시정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동학에 가세한 농민군은 아무런 벌도 가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라고 타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의 수습책에 동학농민군은 불신하는 정부를 믿고 쉽게 응할 리가 없었다.
동학군이 이미 영광을 떠난 뒤 4월21일 오후에야 정읍(19일), 고창(20일)을 거쳐 초토사 홍계훈은 3대의 경군을 이끌고 증원군만을 믿고 영광에 머물고 있는 동학군을 치러 온다는 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겨우 동학군을 뒤따르는 꼴이 돼 좀처럼 선봉에 나서지 않고 지방군만을 앞세워가며 영광에 도착해서 진을 쳤다.
진압명령 받은 관군 압도한 농민군
한편 홍 초토사는 고종의 윤음을 두 군관에게 휴대시켜 함평으로 이동한 동학군진으로 보내서 그들을 초무招無하려고 했으나 두 군관만 도리어 동학군에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했다.
홍 초토사는 또 4월22일 대관隊官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 등에게 300명의 병력과 대포 2문을 주어서 장성방면에 진을 치고 있는 동학군을 기습공격하라는 출동명령을 해 이에 경군(관군)은 영광을 떠나 23일 오전에 장성 월평리 황룡촌에서 동학군 주력부대 4~5,000명의 군세와 맞부딪쳤다.
마침 동학군은 한 곳에 모여 식사 중이었는데 관군쪽에서 기습포격을 가했다가 오히려 치열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군의 반격 기세에 눌려서 대포 2문, 양총 100여정 등 많은 탄약과 무기를 빼앗기고 많은 관군과 대관 이학승만 전사시켰다.
나머지 관군은 동학군의 추격에 몰려 쫓기고 쫓겨 엎어지고 빠지며 영광으로 도망쳐 왔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초토사 홍계훈은 영광에서 패잔병을 수습했으나 이들 관군은 당황하고 사기가 떨어져 진압의 책임을 진 초토사 자신부터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으며 앉아서 공연히 병력의 증원만을 중앙에 호소 요청했던 홍계훈은 다시 영광에서 자기의 무력無力을 정부에 고백하고 외국군 차용 계획안을 건의하는 전보를 중앙에 보냈다. 이 전보를 보면 홍계훈은 아직 동학군과 한차례의 접전도 가져보지 못했으나 ‘동쪽으로 쫓아가면 동학군이 서쪽으로 달아나서 그들을 다 죽여 없앨 도리가 없다’하고 다시 ‘우리는 적고 그들은 많아서 우리가 군사를 나누어 몰아치기 어려우니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리자’고 했다. 초토사의 전보치고는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홍계훈이 이렇게 겁낼 정도로 관군을 무찌른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드높게 된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결국 홍계훈의 외병차용 건의안이 채택(세도재상 민영준이가 직접 주선한 청국 총리 원세개와 묵약)돼 1,500명의 청국군을 불러 들였고(5월2일, 양력 6월5일) 이에 불청객인 일본이 개입하게 돼 청·일전쟁을 낳게 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공공연히 이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상대로 처절한 구국항쟁 벌여
이 때에 왕실이나 양반 등의 지배계급은 물론이요 이른바 근대적 정치인, 군인, 전국의 유림, 기타 국민의 대다수가 일제의 총칼 앞에 아부 굴복 아니면 은신 도피해 감히 항전하는 자가 없었으나 동학군만은 호남, 호서의 남·북접이 합동 궐기해 일본군을 상대로 처절한 구국항전을 벌였다.
이것이 항일 구국투쟁의 첫 장을 장식한 최초의 대대적인 항전이었고 동학군의 2차 봉기였다.
당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아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진용을 오지영이 지은 <동학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갑오 9월 중순까지 동학군의 재기항전 사기史記에 의하면 영광의 동학군 병력이 8천명에, 주도인물은 오하영과 오시영(이들 2명은 손화중 포包로 고창 두령까지 했었다)으로서 호남에서는 영광이 1만여명 병력으로 남원 다음가는 병력을 가진 동학농민군의 봉기지였다는 것이다. 동학군의 재기항전 때 영광의 주도인물(두령 : 장령격)인 오하영, 오시영 등 외 최시철, 오정운 등이 전봉준 대장 휘하의 장령급으로 활약했었다(동학사 204P 참조).
2차 봉기때 영광에서 수백명의 농민군이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게 왜병들이 지금의 영광읍 신하리(현 영광축협 하나로마트에서 200여m 부근)에다 무더기로 화장을 해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땅속을 파보면 불에 타버린 흰 뼈가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다.
동학군의 애국사상 3·1운동으로 재현
갑오년 겨울에 이르러 영광 동학군의 두령 오시영을 잡아 관병에 인도하고 상여를 많이 받은 자가 있는데 이는 이현숙이란 자인데 영광 법성포 군진軍陣 소리小吏로서 갑오년 봄에 동학에 입신해 동학당 행세를 오히려 예전부터 하던 도인보다 더 동학당인 채 하던 배신자였다(동학사 280P 참조).
동학혁명은 그 목적을 다소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중앙에 진출해서 집권층의 구조를 개혁해 국가적인 대개혁을 단행하고 또 외세를 몰아내고 싶어하던 그 웅대한 구상의 실현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동학군의 2차 봉기의 투철한 구국투쟁과 혁명정신 및 애국사상은 훨씬 뒤 3·1운동으로 재현되고 오늘날에도 이 민족의 정신속에 맥맥이 흘러넘치고 있다.
◎ 전봉준이 1894년 3월29일 고부에서 혁명의 기치를 들고 고부 군아를 점령하고 백산白山에 포진한 후 격문을 사방에 발송했을 때 이 고장 출신으로 그 깃발 아래 모여든 장령(將領 : 두령)급은 다음과 같다(성명만 자료에 있을 뿐 자세한 사항의 자료는 미수집 되었음). : 최시철 오정운 최재형
◎ 갑오년 9월 중순 재봉기해 구국항일의 대열에 재기병해 선봉 지휘 궐기한 이 고장 출신 인사와 그 수는 다음과 같다. : 오하영과 오시영은 8,000여군을 거느리고 영광(집강소)에서 일어났다.
◎ 초토사의 보고에 의하면 정부군과 싸워 피해(효수, 임착포살)를 입은 이 고장 출신 인사는 다음과 같다(초토사 보고서의 기록에는 동학군으로 기록치 않고 도둑의 괴수 또는 두목으로 취급하여 기록된 자료를 그대를 옮겼음). ▶ 적괴賊魁 : 송문수 오태숙 등은 효수를 당하였으며 최준숙 외 9명(성명 미상) 등은 임착포살을 당했다. ▶ 거괴巨魁 : 양경수는 임착포살, 이현숙은 효수를 당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