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30주년 잊혀진 역사인가?
영광이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한국현대사 “영광, 동학농민군의 주요 봉기지” 기록 … 영광읍성 법성포 등 격전
영광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1880년대 말부터 동학이 포교된 지역의 하나이자 1894년에 전개된 반중세의 근대개혁과 일제 구축을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의 주무대였다.
당시 영광의 동학교도들은 1893년에 교조신원과 부패관료의 척결, ‘척왜양’의 사회변혁운동인 보은취회報恩聚會는 물론 전봉준(1855~1895)이 주도했던 전라도 금구현의 원평취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들 집회는 조정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으나 1894년 전봉준의 고부 농민봉기에 이어 ‘무장기포茂長起包’로 불리는 1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영광은 이미 1차운동 직전에 민중항쟁이 전개될 정도로 관료들과 법성포 조창의 수탈이 심화된 지역의 하나였다. 따라서 영광은 가장 주도적이며 대규모로 참여한 반중세적 개혁의 ‘동학농민운동의 주무대’가 되었다.(중략)
당시 일제는 수많은 농민군을 영광 신하리 가축시장(우시장) 부근에 무더기로 화장하여 그 시체조차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영광군지> 제1권 92~93쪽, 2013년 발행)
영광군이 수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해 지난 2013년 발행한 <영광군지> 중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서술한 지역의 위대한 역사의 한 장이다.
그러나 위대한 역사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역향토사학계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학농민혁명의 격렬한 전투와 희생이 무참히 발생한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가는 역사가 되고 있어 이에 대한 역사 재조명과 선양사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단 지역의 향토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사회의 부패한 봉건제도와 외세 침략해 궐기한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애국애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2019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기념일은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대승을 거둔 5월11일이다. 이날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나무위키>에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전북 정읍시를 거쳐 고창군에 진입한 농민군이 영광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등재되고 향토사학계에서는 전북 무장에서 영광으로 진입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실제 향토사에서도 그 비중이 크게 기록돼 있다.
농민군의 활약에 앞서 이미 영광지역에서는 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전인 음력 2월말 영광군수의 횡포로 백성들이 봉기하며 관아를 습격한 일도 있었기에 음력 4월 발생한 농민혁명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풀이된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전북 정읍시에서의 황토현 전투, 고창군 무장면에서의 전봉준 선생 봉기 등의 역사적 토대로 매년 기념·선양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인접지역이지만 격렬한 전투와 수많은 희생이 발생한 영광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조차 이뤄지지 않으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진 역사가 되고 있다.
영광읍의 한 50대 주민은 “임진왜란 당시 55명의 의열들이 영광을 지킨 임진수성사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영광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며 “역사책에서만 배웠던 동학농민혁명이 영광에서도 전개됐다는 것을 많은 군민과 학생들이 배우면 좋겠다”고 밝혔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세상에 실존했지만 잊혀졌던 역사 기록을 되살려 주민들의 자긍심을 드높일 수 있는 행정·교육기관의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