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 국가기념일 맞은 영광지역 동학농민혁명 ②

고창 1차 봉기 몇일전 법성면에서 무기 제조한 농민군 영광에 동학 포교 1980년대 말 ~ 90년대 초 … 1차 농민혁명 당시 영광은 ‘혁명 주무대’의 한곳 

2024-05-17     영광21

 

5월11일 제130주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즈음해 혁명의 발원지이며 역사의 획을 그었던 전북 고창군과 정읍시에서 농민혁명 기념행사가 연이어 열렸다. 하물며 인근 광주시에서도 농민혁명을 기념해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어느 단체에서는 이름 있던 의열 뿐 아니라 이름 없이 산화했던 많은 농민군들을 위한 ‘무명 농민군’ 추모행사도 병행했다.  
반면 영광군은 조용하다. 동학농민혁명과 연관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몰라서이다.
본지는 동학농민혁명 제130주년을 맞아 2005년 영광지역 근현대사 조명 첫 번째 시리즈로 연재했던 당시 영광문화원 조남식 전 원장의 <동학농민운동과 영광>을 통해 영광지역에서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을 지난호에서 살펴봤다. 
이번호부터는 영광군지에 게재된 원광대 박맹수 전총장의 <근대 독립항쟁기의 독립·사회운동>편에 게재된 내용을 발췌·편집해 영광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살펴본다. 
20여년 동안 꿈쩍하지 않고 있는 역사 재조명과 부활, 선양사업을 통해 군민들의 자긍심을 찾기 위해서다.            

 / 편집자 주    


동학농민혁명 이전 영광의 동학
조선후기에 영광은 서남연안의 군현 중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동학이 포교된 지역이었다.
영광에 동학이 포교된 시기를 알려주는 공식기록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대체로 인근 무장·고창 등과 거의 같은 시기인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로 알려지고 있다.
1890년대 초반경에 이미 영광에 동학이 포교되었다는 사실은 <취어聚語>에 실려있는 “1893년 음력 3월27일 아침에 호남의 영광 등지에서 1백여인이 역시 도착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1893년 3월27일 아침에 영광을 포함한 호남 동학교도 1백여명이 보은취회(집회)가 열리고 있는 충청도 보은의 장안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당시 영광에서 내륙의 보은까지는 도보로 약 1주일 가량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보통 영광→무장→흥덕→고부→삼례→고산→금산→청산→보은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했다. 
영광의 교도들이 말이나 도보를 통한 교통수단밖에 없었던 당시에 장거리의 보은취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면 이미 영광에는 1893년 이전에 동학이 포교되어 상당수의 교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영광 동학교도들의 조직적인 동향을 공식적으로 처음 보여주는 것은 보은취회의 참여였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1892년 10월의 충청도 공주취회와 11월의 전라도 삼례취회, 이듬해 2월부터 3월초에 걸쳐 서울의 광화문 복합상소와 함께 종래 ‘괘서사건’으로 통칭되는 척왜양斥倭洋 격문 게시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교조신원’을 통한 동학의 공인은 좌절되고 조정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으로 진전되었다. 
특히 동학교도들이 복합상소와 동시에 ‘1893년 3월7일을 기해 외국인을 성토하겠다’는 척왜양 격문을 게시한 후 청·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열강은 군함 등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전개하고 조정을 압박해 이를 주도한 지도부 체포령을 내리게해 동학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과 영광
1893년 3월의 보은취회 당시 조직적이었던 교도와 일반민중은 1894년 1월의 고부농민봉기에 대규모로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부농민봉기가 지닌 지역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전봉준은 동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삼례·원평취회를 주도했으나 조병갑이 저지른 폐막을 시정하기 위해 고부에서 일으킨 지역단위 봉기였다. 
그러나 고부농민봉기는 종래의 민중항쟁이 지닌 지역성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동학을 배경으로 한 강력한 지도부가 존재함으로써 1894년 1월10일부터 3월초까지 약 2개월에 걸친 장기·지속적인 항쟁을 전개해 지역성을 극복하고 전국적 봉기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봉준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만행에 직면해 3월13일경 무장 당산으로 피신한 후 동학대접주 손화중의 전면적 협력속에서 4천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3월21일에 전면 봉기함으로써 고부봉기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무장에서 봉기하였기 때문에 ‘무장기포’·‘1차 기포’라고 부르는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전국 차원의 폐막을 시정하는 정치·사회·경제전반에 걸친 전근대적 모순철폐의 혁명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제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영광은 ‘혁명의 주무대’의 하나로써 전봉준의 기포에 주도적이며 적극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혁명발상지인 무장 당산이 영광과 바로 이웃할 만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지리적 배경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요인보다 오히려 역대 영광군수들의 ‘가렴주구’ 행위에 민중들의 고통이 가중돼 왔으며 법성포의 조창들을 중심으로 한 폐막이 심화됐던데 가장 큰 배경이 됐다고 판단된다. 이는 1차 기포 직전인 2월28일 영광에서 민중항쟁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무장기포는 1892년부터 손화중포가 상당한 교세로 조직화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확인시켜 준다. 당시 무장·영광·고창·김제·만경·정읍·여산의 동학교세가  강했던 사실은 이들 고을이 전라도 여러 고을 가운데 대표적으로 지방수령들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농민군은 3월21일 진량면 용현리(현 법성면 용덕리 용현마을)의 대밭에서 무장하고 포고문을 발표한 후 3월23일경에 고부를 다시 점령했다. 25일경에는 1월의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한때 진을 쳤던 부안 백산으로 이동해 부안·김제·고부·태인 등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들을 결집시켜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그 지도부를 확대 개편했다. 또 ‘호남창의대장소’라는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일반농민들과 향리들의 호응을 촉구했으며 4대명의四大名義와 행진 때의 4대 약속, 행동강령 12개조 등을 발표해 군율을 정하였다. 
특히 농민군들은 각 고을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제작하여 휘날렸는데,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이었다. 이렇게 백산에서 편성한 연합부대에 영광을 대표하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영광지방 농민군들이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반증시켜준다. 

3월25일경 이들 농민군은 전주의 전라감영을 향해 금구원평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라감영군이 대거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백산쪽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4월4일에는 법성포 이향吏鄕들에게 통문을 보내 폐막 시정을 촉구했다.
통문들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었던 구조적 모순을 철폐하려는 농민군의 폐정개혁 의지가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법성포의 하급관리들에게 발송한 것은 이들 이향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1894년 당시 법성포는 전라도 일대에서 거둬들이는 세곡 운반을 전담하고 있었던 전운서轉運署의 파견관리들이 주재하고 선박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통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법성포는 조선왕조의 구조적 모순을 상징하는 지역으로서 농민군의 제1차적인 개혁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어 농민군은 4월7일 새벽 백산에서 전략적으로 후퇴한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 후 서남해안 방향으로 기수를 돌려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했다. 
4월23일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4월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7일에는 경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후 이튿날 자진해산했다. 이 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