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군자로 의미 변화

백용인의 난(蘭)과의 만남 - 난의 역사

2006-09-28     영광21
인간의 진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년 전이고, 식물은 약 200억년 전부터라고 한다. 단자엽 식물에 속하는 난과식물은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널리 분포되어 자라고 있다.

그 중에서 난과식물은 외떡잎식물 중 가장 고도로 진화돼 원종의 총 수만도 3천속 3만여 종을 넘는 대식물군을 이루고 우리나라에도 45속 93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의 꽃말은 미인(美人)이다. 그 우아한 자태와 흉내낼 수 없는 품격을 지녔기에 예로부터 매, 란, 국, 죽 사군자로 꼽아 왔으며 사철 푸른 절개와 단아하고 소박스런 모습을 빗대어 선인들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유하곤 하였다.

'난'이란 단어는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 공자에 의해 엮어진 <시경>에서부터 나타난다. 시경은 기원전 12세기∼6세기까지 불려지던 시 모음집으로, 두 편의 시에 난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군자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고 구애의 물표이거나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되는 표현수단으로 쓰여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야 비로서 난은 군자의 격에 비유되고 이러한 난의 이미지는 중국 전국시대의 굴원(屈原)을 거치며 여러 문인, 묵객들에게 자연스레 군자와 함께 오르내리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과 그 시대에 얘기되어진 난과는 과연 식물학상 같은 종일까'라는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남송시대의 주 희가 저술한 <초사변증(楚辭辨證)>을 보면 식물의 종으로 확실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이 난(蘭)으로 불려진 것은 남송시대로 볼 수 있고 이전에 불려지던 난이란 현재 향등골나물 골등골나물 등골나물로 불리는 등골나물속으로 추정되어지며,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난에게 그 명칭을 물려준다.

근 2천년간이나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난이란 단어가 자연스레 옮겨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빼어난 향기로 군자에 비유되며 난으로 불려지던 중,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난이 발견된다. 같은 격으로 대접받으며 두 종류 모두 난으로 불려지다가 점차 오늘날의 난이 진란(眞蘭)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13세기에는 <금장난보(金障蘭譜)>, <왕씨난보(王氏蘭譜)>가 저술되는 등 난에 관한 여러 책들이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문인들 사이에 묵란화가 유행하게 되어 명나라때에 이르러서는 수묵사군자로 굳게 되었으며, 확실하게 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고운 최치원(857년∼?)의 문장에서 왕비의 덕을 난혜(蘭蕙)에 비유한 글이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용인<영광군농업기술센터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