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보이콧' 신경전 끝에 출발 당일에야 서명
남북 '지방간 교류 합의서' 어떻게 나왔나
2003-04-11 영광21
남북 지방간 교류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받는 전남남북교류협의회(회장 조충훈 순천시장)의 교류협력 합의서 작성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이미 작년 의향서를 상호 교환한 남북의 합의서 작성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이미 낯이 익은 남북 실무자들은 평양공항에서부터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장의 방북이라는 점을 의식한 듯 북측 관계자들은 남측 방문단에 대한 예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북측의 대남 교류사업 고위 책임자가 공식만찬 석상에 두 차례 참석한 것은 물론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차원에서 일정에 없던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이 같은 북측의 '배려'는 한 실무 참사관으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북측 참사관은 "아무리 민간교류 차원에서 방북했지만 지위가 지위인 만큼 신경이 각별히 쓰인다"며 "정세가 엄혹해서 일정을 연기하려는 일부 내부의견도 있었지만 단체장 자격으로 집단으로 방북한 첫 사례여서 원래 일정대로 (방북을) 승인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남북 교류협력사업 합의서 작성시점이 다가올수록 양측 사이엔 미묘한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2일 농기계연구소에서의 실랑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북측은 남측이 "필요한 부품이 아닌 엉뚱한 부품을 보내 농업기계화작업에 애를 먹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남측 관계자들은 "합의사항 외의 문제"라며 "정작 필요한 연구단지 조성은 왜 늦추고 있냐"고 문제제기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측의 논쟁은 "우리가 이해하고 가자"는 남측 방북단의 입장 때문에 크게 불거지진 않았다.
그러나 전남남북교류협의회와 사실상 교류사업을 진행할 평안남도 대동군 현장을 찾은 4월 3일부턴 양측 모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남지역 자치단체장들은 "지원하게 될 농기계 활용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북측 관계자는 "보다 현실성 있는 지원"을 요구했다.
남측 관계자들이 "이전에 지원했던 농기계의 활용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북측을 압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방간 교류' 문구 삽입 놓고 한치 양보없는 심야대결
3일 밤 남측 관계자들은 합의서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 시작했다. 율사출신인 하승완 보성군수와 이용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정영재 광주·전남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이 심야까지 문안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 초안에 대해 북측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북측의 입장은 '지방간 교류'라는 문구를 절대 삽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측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지방간 교류가 명시되지 않으면 합의서는 아무 필요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남측 대표단의 귀국 하루 전인 4일은 양측의 대결과 긴장이 극도에 이르렀다. 아침 일정에서부터 양측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합의서는 예정 방문일정을 다녀온 뒤 논의하자"는 북측의 입장에 남측 대표를 맡고 있는 조충훈 순천시장이 "이런 식이라면 북측의 일정에 따라갈 수 없다"고 일정 포기선언을 했다.
북측 관계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김흥식 장성군수가 "원만히 합의하자"며 양측을 모두 달랬지만 조 시장과 북측 관계자의 대립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나중엔 북측 관계자들이 '일정 보이콧'을 선언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남측 실무자인 이용선 총장과 정영재 총장이 북측 실무자를 달래려고 안간힘을 썼고 일정은 다시 예정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은 '지방간 교류'를 명시하는 문구의 삽입을 둘러싸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의 전일적 지도와 통제체제인 북측으로선 "아무 실권도 없는 지방을 왜 교류대상으로 명시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방간 교류를 목표로 상호 의향서까지 체결한 전남남북교류협의회는 "약속위반이며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팽팽한 줄다리기와 신경전은 5일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상부의 지침'을 다시 받은 북측이 남측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선에서 합의서는 작성됐다.
50년 동안의 분단은 글자 한 자에도 녹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