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식으로 항일무장투쟁 전개
이명하 선생
2006-12-07 영광21
하지만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훼손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박차고 나가 의병투쟁에 나섰다.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해 소모장으로 활동하며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를 숙청했다. 나아가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3도창의군에 참여하고, 각지를 돌며 의병운동의 발흥을 촉구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망명해 이진룡 의병진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3·1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해 국내 진공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다. 또 국내 무장단체인 보합단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며 친일파를 숙청했다.
일제의 ‘경신대토벌’ 작전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 대안의 교통 요지인 중국 안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군수품을 마련해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일본경찰대의 추격을 받아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동지들과 함께 43세에 전사했다.
국가보훈처는 순국한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과 순국 85주기를 기리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