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중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운동가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아닐 때는 아니요 말하면 행동한다.
그래서 옛 동지들에게 비난과 비판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에 주장과 실천은 시민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동지는 뜻을 같이 할 때만 동지라고 말하지만 뜻이 틀리면 바로 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동지이다. 하여 나는 식구(형제)라고 말하고 싶다. 식구는 어떤 고통이 있어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고로 노 ․ 사 ․ 정이 능동적 사회적 협의를 하여 기업과 국가 경제를 살려야 바로 노동자를 사는 것이며, 일자리가 창출 된다
이 바탕 아래 사회보장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교훈이 많다.
특히 아일랜드들 보아라.
그것이 “공존” 이다」
그 후 나는 배일도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위원장을 관심 있게 보았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공준의 꿈”에서
「 자본가를 살려야 우리 노동자가 산다!」와「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법」 편을 보면
한 노동운동가의 고뇌와 자아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배일도 위원장을 믿고 적극적으로 사이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배일도를 국회로
후보 연락처 : 011-9063-3321
「자본가를 살려야 노동자가 산다」와 「노동자를 살려야 자본가가 산다」의 차이
사람의 말에 대해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 것이다. ‘나도 반성할 테니 너도 반성해라!’와 ‘우리 함께 반성하자!’는 언뜻 보면 그 뜻이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 뜻은 조금 달리 들린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말할 때도 우리는 그렇게 묘한 생각의 차이를 드러낸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논쟁이 그것이다.
공존의 철학을 말하면서도 노동자와 자본가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을 한다.
노동자가 주장한다. 우리 노동자를 살려야 자본가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가 주장한다. 우리 자본가를 살려야 노동자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두 주장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또 자본가는 자본가대로 우선 자신이 살아야 상대도 살 수 있다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우선 순위에서 앞선다. 자기 이익을 찾는 존재로서 솔직한 자기 고백일 수 있겠다.
그러나 솔직하다는 것만 가지고 공존의 원리를 마련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주장을 하는 노동자와 자본가는 각각 자신의 말이 상대방의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노동자가 주장한다. 자본가를 살려야 우리 노동자가 살 수 있다.
자본가가 주장한다. 노동자를 살려야 우리 자본가가 살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버리는 사람이 얻는 것이고, 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공존의 철학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여, 이 사회의 주체로서 우리가 먼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자본가를 살려야 우리 노동자가 산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배일도를 국회로
후보 연락처 : 011-9063-3321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법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일 가운데 하나가 믿었던 지도자에게 속는 일이다.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외친다.
“나를 따르거라!”
병사들은 지휘관을 믿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진격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목적지로 여긴 곳에 다다른다. 그런데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던 지휘관이 말한다.
“어, 여기가 아니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병사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지휘관을 쳐다본다.
황당하다는 정도의 표현으로 족한 상황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지휘관의 잘못으로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참담한 비극도 전쟁의 무대에 올려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 비극을 연출한 지휘관의 판단 착오는 용서받기 어렵다. 실수라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인 것이다.
그런데 실수와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지도자가 따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거짓 꿈을 팔아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지도자들이 우리를 절망케 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쥐락펴락 하려고 온갖 탈을 쓴 채 사람들 앞에 나선다.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그들을 노동 운동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길로 가면 인간 해방, 노동자 해방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니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갑시다! 자본가는 우리의 적이니 목숨 걸고 싸웁시다!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이 길을 의심하지 마시오. 다른 길이 없는가 하고 옆과 뒤를 돌아보는 자들 역시 우리의 해방을 방해하는 노동자의 적이니 물리칩시다. 피눈물나는 고통도 조금만 참읍시다. 곧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날이 올 것이오.”
인간 해방의 땅에서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은 우리의 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노선이 잘못일 수도 있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민주의 탈’ ‘해방의 탈’을 쓴 채 노동자들을 흥분시키는 지도자들이 실상 우리의 꿈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하고 참담한 일인가.
헛된 꿈을 팔아 사람들을 속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의 소중한 꿈을 갉아먹는 지도자들, 그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민주와 해방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내 직장인 서울지하철공사의 노동조합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온 나라에 구조 조정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해고자 생활 10년 만에 복직한 내 직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경영진에서 희망 퇴직과 인력 교류를 통해 인원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인력 교류는 2기 지하철을 운영하는 도시철도공사 등과의 교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발표를 정리 해고 통보로 받아들인 당시 집행부는 결연한 의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단 한 사람의 정리 해고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 단결해서 투쟁하자!”
정리 해고를 당하고 싶은 노동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단 한 사람의 정리 해고도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은 끝내 이루어내고 싶은 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꿈만으로 살 수 없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꿈만으로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선동하는 것은 거짓 꿈을 파는 기만이다.
투쟁 선언은 노동조합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런 결정에 이르기까지 조합 간부들은 입으로는 ‘민주’를 내세우면서도,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고 간부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지시하고 명령하고 통제하고 군림한다. 물론 냉철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해결책보다 명분을 앞세우면서 말이다.
민주를 앞세우지만 민주적이지 못하고, 명분만 앞세우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이들이 거짓 꿈을 팔았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경영진이 2기 지하철 등에 3백 명을 보낼 계획을 잡고 신청을 받아 보니 3천5백 명이 가겠다고 지원을 했다. 지도부가 어떤 기만적인 명분을 내세우건, 현실은 생존 원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내거는 명분, 그것에서 거짓 꿈은 시작된다.
그러한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사람의 본성을 똑바로 알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찾는 존재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본성을 알면, 지도자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고 어떤 꿈을 제시하건 일단 그것이 지도자의 자기 이익에 충실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기 이익은 권력이나 금력이 될 수도 있고, 명예욕이나 성취감이 될 수도 있고, 옳은지 그른지 검증되지 않은 자기 신념에 대한 만족감이 될 수도 있다. 지도자의 취향에 따라 자기 이익도 다양하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 추구 그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문제는 현실을 떠난 명분과 거짓 꿈으로 사람들을 속이려 할 때 생긴다. 그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지도자여, 그대가 자기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는 줄 다 알고 있소. 그런데 그대가 내건 명분과 꿈이 나의 자기 이익과는 다른 것이오. 그렇기에 나는 그대를 따를 수 없소.”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태도는 이 사회에 불신 풍조를 조장하고, 공동체의 원리를 파괴하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부추긴다고 말이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공연한 걱정이다. 거짓 꿈에 속지 않고 현실의 토대 위에서 꿈을 가꾸어 가겠다는 태도가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게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가면 쓴 지도자의 속임수가 사회를 그렇게 만드는 주범인 것이다.
지도자의 자기 이익과 그를 따르는 사람의 자기 이익이 조화를 이룬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 두 이익이 부딪치는 경우인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이익은 감추고 ‘민주’니 ‘해방’이니 하는 그럴 듯해 보이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창한 명분 앞에서 움츠러들어 감히 자기 이익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한다.
지도자는 자기 이익을 감추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하는 허위의 땅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가면 쓴 희망, 거짓 꿈만 춤출 뿐이다.
부처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삶의 지혜를 전한다. 법(法)은 물(氵)의 흐름(去)과 같은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그것을 거꾸로 흐르게 하려는 것은 법이 아니다.
자연스런 사람의 본성을 감추는 짓도 법이 아니다. 그 본성을 제대로 알고 거짓 꿈을 파는 지도자에게 속지 않는 것이 법이다. 지도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하여 살면 적어도 남한테 속은 인생은 살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