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래야 잊히지 않는 영광의 아들, 박관현 열사
잊을래야 잊히지 않는 영광의 아들, 박관현 열사
  • 영광21
  • 승인 2013.05.1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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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박행순씨와 518문화재단 송선태 상임이사가 기억하는 박관현
▲ 박관현

서른세번째 5·18민중항쟁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식제창 문제를 놓고 국가보훈처와 5월 관련단체, 시민·사회단체의 갈등으로 연일 시끄럽다. 한해도 조용할 날 없이 저마다의 입장과 갈등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5·18민중항쟁으로 몸과 마을을 다친 당사자들이나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올해도 어김없이‘잔인한 5월’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왔다.

“그날(1980년 5월18일) 이후로 이렇게 날씨도 좋고 어린이날이다 어버이날이다 즐거워야 할 5월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두려워 졌다.”

5·18민중항쟁을 다룬 한 다큐영화에서 당시 현장에 있다가 살아남은 한 시민은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5·18민중항쟁의 관계자들이 5월을 두려워 하고 있다. 
박관현 열사의 누나 박행순(61·광주광역시 거주)씨도 예외는 아니다.

유신체제를 싫어했던 동생
5·18민중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행순씨는 “관현이를 떠나 보내고 3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맘때가 되면 관현이가 더욱 생각나고 괜히 우울해지곤 한다”며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난 박관현 열사는 교육열이 굉장히 높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이 광주에 있는 수창초등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어머니도 장남이었던 박관현 열사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광주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차려 운영할 정도로 열성을 다했다.

박행순씨는 “어머니는 자식덕을 보려하지 않고 항상 관현이에게 ‘큰 인물이 돼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누구보다 자식인 박관현 열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고 재학시절 박관현 열사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교에 못다니게 된 일을 크게 안타까워하면서 각 반마다 돌아다니며 학비 모금운동을 펼치기도 하는 등 마음이 따뜻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등 이때부터 학생운동가의 자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관현 열사는 대입시험에서 서울대에 2번 낙방하고 전남대에 진학한 뒤 민주선거를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다.

박행순씨는 “당시 동생들과 자취하던 광주고 주변에서는 ‘광주고 출신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며 난리가 났다”며 “그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전남도청에서 첫 연설을 할때 관현이가 총학생회장이 된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박관현 열사가 전남대총학생회장으로 5·18민중항쟁에 불을 지핀 투쟁의 상징이었지만 누나 박행순씨에게는 그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인정 많은 다정한 동생이었다.

“리틀 DJ가 태어났다”
5·18기념재단 송선태 상임이사는 “5월14일부터 16일까지 ‘박관현 열사가 주도한 집회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광주항쟁이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며 “항쟁 당시 전남도청에서 연설하던 그의 모습과 고등학생, 시민들로부터 끝없이 이어지던 지지선언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리틀 DJ가 태어났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고 한다.
박관현 열사는 5월18일 윤상원 열사의 권유로 광주를 떠나 여수로 은신했지만 1982년 4월 주민의 신고로 체포됐다.

그 후 광주교도소에서 교도소내 처우개선 등을 문제삼으며 세차례에 걸쳐 단식투쟁을 하다 결국 그해 10월12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 상임이사는 “박관현 열사가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아, 저 형이 5·18민중항쟁때 광주를 떠난 죄책감을 안고 죽을 각오로 투쟁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열사는 떠났지만 우리 80동지회 등 남은 사람들은 그를 인생의 모델로 삼고 여전히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그리움을 전했다.

송 상임이사에게 박관현 열사는 항상 대중을 먼저 생각하고 고집스러울 만큼 원칙을 중요시한 앞으로 다시는 없을 걸출한 지도자이며 따르던 선배이자 인생의 모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누나 박행순씨는 지난 2월 법원을 상대로 항소심 진행중에 사망한 박관현 열사의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판부는 “재심청구는 유죄의 확정판결과 항소 또는 상고의 기각판결에 한하도록 규정한 현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 사망으로 항소심에서 공소기각 결정이 확정돼 이미 효력을 상실한 판결에 불과하므로 재심청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현 행정소송법상 박관현 열사는 무죄를 선고받는 명예회복은 어렵다는 것이다.

단 재판부는 박관현 열사의 공소사실에 대해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 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를 한 것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로 무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청구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박관현 열사의 행위가 무죄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박행순씨는 “관현이처럼 재판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관현이 법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고 포기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누나 박행순씨는 동생의 못 다 이룬 꿈을 부족하나마 대신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생이 꿈꾼 자주·민주·통일의 바람을 백분의 1만이라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녀에게서 마음씨 좋던 박관현 열사를 발견한다. 누나는 마지막으로 동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고향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 관현이를 항상 잊지 않고 ‘영광의 아들’로 기억해 주는 영광군민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이서화 기자 lsh122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