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과 인생
등산과 인생
  • 영광21
  • 승인 2004.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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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 50회특집
산(山)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에게 산은 신이 사는 곳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지구 중심인 히말라야가 신의 거처인 듯 해뜨는 동방의 태백산에도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살다가 단군이란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우리민족의 시조이며 고조선을 세우신 분이다. 이렇듯 우리조상은 하늘의 신이며 생활터전은 원래 산이었다. 그러다 점차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와 무리지어 마을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간 마찰과 불화가 생겨나고 법과 질서가 필요하게 됐으며 소중히 간직했던 자유와 아름다움을 잃게 돼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람들 가슴에는 신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어 그것을 찾으려는 심성에 이끌려 원래 고향인 산봉으로 오르고픈 생각의 싹이 돋아났다고 본다. 하늘과 맞닿아 높이 솟은 산봉에 오르면 쉽게 하늘로 올라가 원래의 모습인 신이 될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램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줄기차게 산으로 올라갔던 것이 등산의 시초이지 않을까....

산봉은 하늘로 올라갈수 있는 지상최후의 정류장이며 그곳 산봉에 도착해 신을 향해 기원하는 행위가 등산의 원형이지 싶다. 그후 사람들은 사냥을 하러, 식량을 구하러, 약초를 찾으러, 땔나무를 구하러, 심신을 단련키위해 또 자기 본 면목을 찾아서 자기의지를 극복해 성취감을 맛보려고도 산을 오르게 됐다.

사실 일본식민지 시대에 수입된 서구 알피니즘은 우리 선조들이 행한 이른바 목적 산행에 의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알피니즘이 순수 등산의 표상이며 전통인양 현재 우리등산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고쳐야 마땅한데도 아직도 우리등산 문화는 서구 알피니즘의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리식 산행의 원형이라고 할수 있는 기원산행은 무속행위라고 해 정치인과 사회종교단체, 산악인들까지 가세해 핍박하고 있는 판국이다. 기원산행 발길이 잦은 대상지는 각처의 명산이다. 계룡산, 팔공산, 지리산, 가야산 등지에 가보면 절실히 기원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들도 불법으로 규정돼 있다.

그러나 영국의 등산가 ‘조지휜치’(Qeorge Fincn)는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등산은 외형상 의식주의 이동이며 내적으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고생하는 그 과정은 인생과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등산가 ‘샤델리우스’는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등산만이 가지는 특색과 특권이 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는 정신과 행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등산하는 사람은 많은데 등산 서적을 읽는 사람이 적은 것도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등산가는 선인들이 간길을 더듬고 언제나 추 체험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로 인해 미지의 세계가 없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서적을 통한 선구자와의 교감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1950년 인류최초로 8,000m의 정상에 오른 프랑스의 등산가 에르조그(Herzog, Maurice, 1919)가 그의 저서 안나푸리나 등정기의 결론으로 한말에서 우리는 등산과 인생의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안나푸리나에 빈손으로 갔지만 안나푸리나를 오름으로 인생에 새 장을 열었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리나들이 있다. 미국의 등산교본에서 등산가는 산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로 대자연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권에는 특권과 보답도 따르지만 책임과 의무 또한 따른다고 했다.

알피니즘이 무엇인가 알려는자 그리고 알피니스트가 되려는 자는 남다른 특권과 책임과 의무가 어떤것인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 알피니즘에서 우려하고 견제해야 할 문제는 보편화에 따르는 세속화에 있다. 문명이 자연의 베일을 벗기면서 온갖 편의성을 제공해 왔고 알피니즘 세계에 존재하는 위험성과 불안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알피니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알피니즘의 세계에 과연 어떤 매력이 있으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우리는 이 시점에서 ‘프랑크 스마이스’(Frank Smytne 1900∼1949)가 알피니즘의 편의성을 이반 쉬나이드가 불확실성의 문제를 제기했던 것을 다시 주목해야 할것이다.